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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Jun 26. 2024

그 제주도의 푸르게 설레던 밤

(2)

한참만에 입을 연 남자가 한 말은 알쏭달쏭했지만 별로 신경 쓰이진 않는다. 연애를 안 해 본 것은 아닌데 이렇게 초반에 ‘결혼’에 대한 단서를 붙이는 남자는 처음일 뿐. 대체 결혼이라니. 결혼이란 것이 얼마나 사랑해 미칠 것 같아야 할 수 있는 것인지 조차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러니 내게 그런 결심이 쉽사리 생길 일 없다. 저 남자는 가만 보면 쓸데없는 단서를 달고 있다.


“장 대만 선생님. 저는 결혼이란 걸 할 생각이 머리카락만큼도 없습니데이. 그러니까 쓰잘데기없는 걱정은 붙들어 매시고 일단 사귀자는 프러포즈를 제주도까지 데려와서 한 것에 점수 드릴께예.”


그제사 어두웠던 남자의 표정이 아침처럼 환해졌다. 가만 보면 은근 소심하게 필요 없는 걱정 사서 하는 스타일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한 대리를 비롯한 똥파리들이 남자 친구 있냐고 물으면 뭐라고 한다?”


“암 테이큰. 투 레잇.”


“굿. 그렇지만 백 점 까지는 아니고… 정확하게 ‘장 대만 씨 여자 친구입니다.’라고 말해주기 바래."


“뭐 어렵지 않아. 이젠 이름 안 챙피한가 봐?”


“이럴 땐 좋지. 이름이 그다지 흔한 편이 아니니까 머지않아 서울 시내 사람들은 우리 아가씨가 장 대만이 여자 친구라는 거 다 알게 되지.”


마침 나온 알밥 뚝배기에서 단무지 고명을 골라내던 남자가 말했다. 다른 접시에 단무지를 덜어내더니 잘도 비벼서 다시 단무지를 위에 올려 뚝배기를 내 앞에 놓아준다.


“같이 비비면 뜨뜻한 단무지를 먹게 되지. 그다지 맛있지 않잖아.”


꼼꼼하지만 쪼잔하지 않다. 주도면밀하지만 그렇다고 상대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다. 설렁설렁해 보여도 모두 계획하에 행동한다. 사실 이 남자에게 빠지는 것은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그날을 돌아보면 그렇다.

분명 차가웠지만 매섭진 않았던 남쪽 바다가 그랬고, 그 바다가 방금 손질해서 내어 놓은 싱싱한 회가 그랬고, 세심하지만 억지스럽지 않았던 그 남자의 세련된 매너가 그랬고, 인간 사회에서 누리는 각종 쾌락에서 많이도 단절되었던 일벌레 이십 대 꼬마는 조금만 단 맛을 보여줘도 이내 8월 땡볕에 내놓은 빵빠레 마냥 녹아갔다.


대학시절 춘천 가는 기차에선 김현철의 지난 노래를 무리 지어 불러댔던 것처럼, 제주도에 오니 새삼 우리나라엔 지역별로 기리는 노래들이 잘도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입에서 저절로 ‘제주도 푸른 밤’이 흘러나온다.


“… 제주도가 두 번째라고 했나?”


“대학 3학년 때 과에서 우르르 몰려왔던 것 다음으로 …”


“일상에 지치면 사람들은 둘 중 하나를 하잖아. 탈출 혹은 은둔… 네가 자주 가는 만화방이 은둔이라면 가끔 이런 곳으로 오는 건 탈출이지. 개인적으론 탈출이 더 효과적이라고 보거든.”


“보세요… 은둔은 보통 돈이 별로 안 들지만, 탈출쯤 하려면 그것도 비용이 발생하거든요?”


“탈출 비용쯤은 얼마든지 대 줄 수 있는 남자 친구가 있으면 해결되거든요?”


“있는 자랑은 그만 좀…”


이라고 하면서도 꽤 근사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토요일 점심쯤에 비행기를 태워 탈출시켜 주는 남자 친구라니… 없던 남자 복이 이제야 생기려나 싶기도 하다.


자그마한 도꾸리를 하나 금세 비우니까 아줌마가 어디선가 씨씨티브이라도 보고 있었던 양 다음 병을 알아서 가져다주셨다.


“음… 어차피 비행기는 딴 사람이 모니까, 술 자셨다고 쉬었다 가자 이런 쌍팔년도 수법은 안 쓰시겠죠?”


“저 내일 집안 행사 있습니다.”


대체 어떤 마약을 풀었나 의심스러울 만치 중독성이 강한 매운탕을 바닥이 보이게 비울 때쯤엔 장 선생이 이미 십년지기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흔한 연예인 이야기 한 번 하지 않고,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이야기 없이, 사는 이야기만 했을 뿐인데도 그는 하나 지겹지 않은 남자였다. 


“요즘 가장 마음이 가는 책은?”


면접에나 나올 법한 진부한 질문조차 흥미로워질 만큼 남자는 내 마음에 이미 자리 잡다 못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언젠가 채팅방에서 했던 질문과 같다. 이 남자는 흔해 빠진 가장 좋아하는 책을 묻는 질문에 ‘요즘’이라는 유동적인 단서를 붙여 철마다 물어볼 남자다.


“글쎄…”


이런 진부한 질문이 지겹지 않은 이유는 이런 뻔한 질문들이 사실은 점잖게 나를 파악하는 질문이란 것을 알게 된 나이였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음악, 아끼는 책, 흠모하는 아티스트, 여가시간의 활용… 등은 수 세기를 거치면서도 멸종되지 않는 사적인 질문이지만 가장 부드럽게 접근하는 ‘상대방 파악하기’란 것쯤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상대에게 직접적으로 너를 보이라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그 사람이 내어주는 힌트로 그 사람을 알아보려 노력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질문이라는 것을… 그 의미를 알게 되면 이런 단순한 질문에 좀 더 신중히 대답하게 된다. 그 사람이 나를 정확하게 알아봐 주는 것을 원한다면…


“하긴… 딱 하나만 골라보라는 식의 질문은 살짝 폭력적이지. 나부터 대답할까? 인상적인 책은 내 인생에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었지.”


“… 여지껏 분위기 좋았지 말입니다… 갑자기 이딴 식으로 현학적이게 나오면 매력 없지 말입니다.”


설마… 정치 경제 책에 나오던 그 국부론? 아니 그 정도는 읽어줘야 이 남자와 대화가 가능한 것인가?


“아니, 그런 책 까지도 읽게 하는 그런 철두철미한 엄마 밑에서 자랐다고나 할까? 우리 어머니는… 마음이 허해서 많은 것에 몰두하시거든…”


왜 관계의 초반이 재미있는 건지 알고 싶다면 머리 쓰는 게임을 생각해 보거나, 조각이 엄청 많은 고난도 퍼즐판을 생각해보면 된다. 뭐든 시작이 재밌게 마련이다. 아직 무궁무진하니까… 무엇이? 알아야 할 것들이… 그의 어머니가 왜 마음이 허한 지, 왜 마음이 허해서 자식의 공부에 더없이 집착했는지… 그런 것은 그가 털어놓을 때까지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가만 보니 이 남자는 나의 이런 참을성에 매력을 느끼는 듯하니까 말이다.


아무리 따뜻한 남쪽 나라 제주라지만 겨울바람은 살을 파고들듯 아프다. 잠도 제대로 못 잔 피곤이 이제사 몰려오는지 횟집을 나서 바로 앞의 해변을 따라 걷는데 온몸이 따로 또 같게 떨려왔다.


“오늘 꼭 서울에 가야 하는 이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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