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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Jul 05. 2024

젖어들다…

(1)

 여기는 종로 1가. 대한민국 넘버원 기름집 빌딩 22층이다. 

일요일이고, 일요일이라 함은 대부분 집에서 소파랑 혼연일체 되어 있어 마땅한데 대한민국 직장인의 현주소가 이렇다. 

에러 하나 뜨니까 부장부터 말단까지 평일처럼 말끔하게 차려입고 사무실에 모인 데다가 대체 경리 아가씨는 이 일과 무슨 상관이라고 호출되어 있는지 모를 일이다. 상당히 마뜩지 않은 북적댐이다. 

이러다가 이 인간들이 어깨동무하고 종로 3가 빈대떡 집을 쳐들어가는 건 시간문제라는 것을 이 을은 온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경미 씨는 웬일이야?”


“아… 저는 부장님이 한 대리님 바뀐 핸드폰 번호를 모른다고 전화하셔서는 할 일 없음 비상인데 나와서 격려라도 하라고…”


기가 차는 신 노예생활.

저 아가씨는 정규직도 아니고 파견 계약직인데도 자기 업무랑 아무 상관도 없는 비상사태에 들러리로 나와 있어야 한다. 그녀는 소소한 반항심을 보여주고자 함인지 심드렁하게 모니터 앞에 거의 드러누워 온라인 고스톱을 하는 중이었다.


이 기름집 핵심 부서인 경영지원팀에서 쓰는 비밀스러운 예산 시스템이 있는데 전산 시스템이지만 돈과 직결된 거라 이 부서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전산에 매우 취약한 문과생 집단에 이 이과생 여자가 핵심적 존재가 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 그들이 이렇게 비상사태라 불러 싸면서 호들갑을 떠는 경우 와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컴퓨터가 쥐약인 문과생들인 주제에 서울대 존심은 있어서 호기심 불태우며 이것저것 남의 프로그램 건드려 보다가 보안 떠서 락이 걸린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서로 본인은 죽어도 안 했다고 강조하니 누구 짓인지는 알 수 없었던 에러 소동이 두 시간쯤 만에 진화되자 철 지난 삼국지 게임에 심취해 있던 안 부장이 귀신같이 알고 일어섰다.


“ 비 오네? 다들 신의 계시를 무시하진 않겠지?”


“뭔 신의 계시요?”


일요일에 회사 나오는 게 즐거운 유부남이 당연히 곱게 집에 보내주지 않을 것을 알았다. 굳이 끌려가지 않고 애써서 집으로 갈 수도 있다. 그런데 한 대리가 앞장서는 것을 보니까 참석의지가 굳건해진다. 남자에게 자초지종을 묻지 않았다. 앞으로도 먼저 말하지 않으면 안 물을 것이다. 그렇지만 궁금하다. 혈연관계인 저 인간을 좀 파면 정보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이 청승맞게 겨울비 내리는 일요일, 빈대떡 회식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한다.


종로 1가와 3가 사이 뒷골목에는 옛 한양의 얼을 지키고자 함인가 빈대떡, 감자전, 파전 등등에 막걸리를 주 종목으로 하는 현대판 주막, 민속주점이 많았다. 모두가 같은 신의 계시를 받는 모양 비 오는 날이면 좁은 골목이 터져나가곤 했다. 일요일인데도 꽤 사람들이 북적이는 단골 민속 주점에 우르르 들어선다. 여전히 오늘 있었던 에러에 관해 얘기하면서… 이 불쌍한 직장인들은 일요일에 특근을 하고도 모자라 술 마시러 오는 길에도 회사 걱정인 것이다. 알고 보면 인간들은 다들 알게 모르게 세뇌 당해 있다.


“빈대떡만 시키지 말고 육전도 좀 시켜요. 

김 대리 빈대떡 안 좋아해.”


“뭐여, 빈대떡도 안 좋아해? 닭만 안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근데 한 대리는 김 대리를 엄청 잘 알아. 가만 보면.”


특별히 빈대떡을 사랑하시는 안 부장이 육전을 더 좋아하는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


꼴랑 내 전 취향 하나 아는 것뿐인데 갑자기 한 대리가 심심하면 좋아한다고 했던 것이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살짝 든다. 그렇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말이다. 


언젠가부터 회식자리를 갈 때면 한 대리는 항상 내 옆에 붙어 들어와서는 옆 자리에 앉았다. 떨어져서 들어오게 되더라도 겉옷을 옆에 두었다가 나를 앉히려고 자리를 사수했다.


“근데 아까 뭐야 진짜? 진짜 대만이랑 밤 보낸 건 아니지?”


어떻게 말을 꺼내나 고민하는 사이에 바싹 당겨 앉으며 한층 음흉한 목소리로  한 대리가 먼저 따지기 시작했다.


“같이 제주도 갔었어요. 그랬다가 오늘 아침에 어머니 전화인 거 같은데… 받고는 거의 한 마디도 안 하고 그렇게 간 거예요.”


“아 걔 원래 마마보이야. 엄마가 부르면 지구 어디서도 달려가지. … 뭐 어쩌면 마마보이가 안 될 선택도 가지지 못했는지도 모르지만 말야…”


동동주가 도착하기도 전인데 한 대리가 횡설수설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건 알아요…”


반듯하게 공부 잘 한 남자 중 마마보이야 숱하게 보았다. 그리고 나는 사실 마마보이에 대해 별 반감이 없는 편이다. 엄마 말을 좀 많이 잘 듣는 것이 뭐가 나쁜지 아직 잘 모르겠다. 

보통은 잘 자란 마마보이들이 매너면에서는 나쁘지 않았다. 


 “그거 있지? 모르는 게 약이고 아는 게 병이다. 

하여간 그런 케이스야. 좀 많이 운이 나쁜 케이스기도 하고…”


“ 아 뭔 소리예요.”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사이인걸 뻔히 아는데 좀 뻔뻔하게 요구했나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답답하고 궁금하다.


 “대체 왜 빠진 건데? 정말 솔직하게 내가 더 낫잖아? 난 매일 보는 사이고, 답답하게 굴지도 않고, 키도 내가 더 크고, 생긴 것도 낫고… 의사 하다 쉬고 있는 백수보다 내가 못난 게 뭐가 있어서?”


 “… 그러게요… 세상에 답 없는 것도 있으니까요… 어쨌건 저는 잘생긴 한 대리님 보다 대리님 사촌이 좋은데요… 제가 지금 너무 답답해서 동동주 먹음 체할 것 같은데… 슬쩍 전화 좀 해보시면 안 되나요?”


 “… 뭐 이제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사이인 거 아니까 이런 말 까진 할 필요 없겠지만… 거의 일 년 가까이 김 대리 하루 온종일 보는 사이에, 이러는 거 처음 봐서 하는 말이야… 

걔는 아니다, 진짜… 결혼, 뭐 이런 거 생각하면 더더욱 아니고…”


 “왜요!!”


 “… 일단 전화는 해 볼게…. 아까 보니까 좀 심상치 않긴 하더만…”


능글맞은 미소를 항상 그린 듯 장착하고 있는 한 대리가 처음 보는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하는 수 없다는 듯 전화를 했지만 예상했듯 그는 응답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인간이 술에 취해 기댔을지 모를 낡은 민속주점의 상 끄트머리에 핸드폰을 걸쳐두고 한편 취한 부장을 비롯한 갑들의 횡설수설을 적당히 받으면서도 혹여나 그 취객들의 소음에 벨 소리를 못 들을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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