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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Jun 19. 2024

좀 더 보여주면 그만큼 깊어진다…

(3)

“몰라서 물어?

이제 내가 자주 만날 거니까. 그쪽을… 그리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무엇도 공유하지 않는 스타일이거든. 그게 다야. 나 자주 볼 거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튕기느라 아니라고 펄쩍 뛰기도 애매하다. 그래서 입을 닫는다.


“본인은 궁금하면 딱 짚고 넘어가더니… 왜 내 질문엔 대답이 없지?”


남자는 걸음을 멈추었지만 어색해서 나는 멈추지 않는다. 그러자 남자가 왼 손을 호주머니에서 꺼내 팔을 살짝 잡았다.


“뭘 또 그걸 그렇게 물어…”


말이 끝나기 전 어느새 몸이 돌려져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때, 또 눈이 내렸다. 막 시작하는 백설기 가루 같은 눈이 남자의 유독 까맣고 윤이 나는 머리 위에 내려앉는다. 쌓이기엔 아직 많이 부족해 보이는 수줍은 눈은 내려앉자마자 바로 녹아버린다.


“눈 온다…”


“그래… 처음 만난 날도 눈 오더니 오늘도… 

그래서. 나를 자주 볼 건지 대답해.”


뭐라 말을 해도 아니… 지금 이 상태에서 신체의 어느 작은 부분을 움직이는 것도 부끄러울 지경으로 어색해서 혀는 굳어 버렸다.


“알았어. 대답이 ‘노’라면 밀어내.”


말을 마치자마자 남자는 그대로 나를 끌어안았다.


“아… 따뜻하다… 걸어오면서 보니까 추운지 볼이 너무 빨갛더라. 한 번 안아주고 싶었어.”


사실 포근하고 따뜻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옆을 스쳐 지나가지만 우리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다. 꽤 한참을 그렇게 안았던 남자는 천천히 팔을 풀었다.


“안 밀어냈다? 

성실하지만 무뚝뚝한 김 대리님의 마음을 잘 알겠어. 

앞으로 오빠야가 잘해 줄게.”


“뭐래, 진짜…”


진짜 뭐래… 왜 나는 부끄러우면 자꾸만 성게가 되지…

마음은 그렇지 않은 게 뻔하면서 입으로는 자꾸만 가시를 세우고 있다. 그냥 뭘 해도, 무슨 말을 해도 부끄럽다. 이렇게 부끄럽기 시작했다는 것은 대체 얼마나 저 이 에게 빠져들고 있다는 것인지… 새삼 위험스럽다. 


“곧 보자, 또. 일단 두세 시간이라도 꼭 자고.”


어차피 만화방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었다. 신촌 한복판에 2층은 카페, 3층은 데낄라 바 가 성업 중인 흔한 빌딩 4층과 옥탑을 빌려 살고 있었다. 아는 사람들은 너무 시끄러운데 사는 것 아니냐고 한다. 안다. 많이 시끄럽다. 그렇지만 그들은 모른다. 지방 출신의 미혼 여자가 혼자 살기엔 너무 조용한 곳이 제일 위험하다는 것을.


“… 이번엔 전화할 거요?”


없어 보이지만 어쩔 수 없다. 난 아직도 저 인간의 전화번호를 모르는데 대체 언제 어떻게 자연스럽게 물어보아야 하는지를 고르다가 또 시기를 놓쳤다.


“… 아니. 난 사실 전화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해. 얼굴을 보고 말하는 것을 좋아해.”


“얼굴을 볼라면 일단 전화를 해서 약속을 잡는 게 기본이잖아.”


“그럼 그 기본인 걸 왜 처자는 끝까지 안 묻소? 그러지 말고 이 참에 그냥 물어보소. 전화번호 물으면 내가 상도 주지.”


남자가 또 알듯 말 듯 묘하게 웃는다.

아무리 뜯어봐도 조각같이 생기진 않았다. 그런데 이 남자가 유독 하얀 이를 드러내고 씩 웃을 때마다 심장에 균열이 가는 듯 대책도 없이 두근댄다.


“… 희한한 데서 자존심 세우네? 그래 번호가 뭔데?”


사실 내가 물을 수도 있다. 그런데 왜 그러지 않았는지는 이미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와 같은 마음인지 최소한의 확인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전화번호 묻기보다 더한 호감을 보여놓고도 남자는 여전히 전화로 유치한 스릴을 부린다.


남자는 대답 대신 핸드폰을 가져가서 직접 저장을 해서 돌려준다. 뭔가 반짝이는 것과 함께… 무엇일까 궁금하기도 전에 정체를 드러낸 그것은 또 오백 원짜리 동전이다.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방금 한국은행에서 탄생한 신생아 오백 원…


“안 줘도 된대니까? 볼 때마다 줄거유?”


“어… 볼 때마다 줄라고… 오백 원짜리 뒤에 뭐가 있어?”


“… 학?”


“그니까… 좋아하는 사람한테 학 천 마리 이런 거 접어준다던데? 난 학은 접을 줄 모르니까 만날 때마다 오백 원으로 때울게. 그러니까 숙취해소용으로 메로나 사 먹지 말고(언젠가 채팅방에서 아침에 과음으로 헛구역질 올라올 땐 출근길에 메로나 하나를 아주 천천히 빨아먹으면 신기하게도 새로 태어난다는 사실을 전도한 바 있다.)이 오백 원 들은 모으는 거다? 알았지? 다음에 검사한다.”


“…”


“4층이랬나? 불 켜지면 출발할게. 얼른 올라가.”


장 대만 씨는 깔끔하다.

구질구질하게 시간도 늦었는데 커피 한 잔만… 이라던가 눈이 묻어서 잠깐 녹이고 가겠소… 라든가, 더 나아가 바닥에서 잘 테니 하룻밤 신세 좀 집세. 식의 나그네 심보를 전혀 부릴 생각조차 없었다. 거의 나를 떠밀다시피 하며 배웅에 전력을 가하는 것이다.


“조심해서 가.”


코 끝이 살짝 빨개진 남자가 마지막으로 다시 이를 드러내고 웃어 보인다. 그냥 심장이 좀 어디론가 내려갔다가 서서히 올라오는 느낌이다.


“아쉽겠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어서 들어가.”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화가 난다. 분명히 배려해 주어 고마운데 또 고맙지 않다. 어차피 늦은 거, 청춘인데 만화방에서 그대로 밤을 새우고 출근해도 괜찮았으니까. 그런데 남자는 고집하지 않았으니까… 나만큼 설레지 않는가 불안하기 때문에 화가 난다. 금방 잠이 들 것 같지도 않았는데 까딱하면 완전히 늦을 뻔했다. 상무 PT가 11시부터인데 눈을 뜨니 9시 5분 전이다.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전설의 스즈끼 상이 출근할 차례다. 그야말로 밑 화장만 완전히 끝낸 상태, 파우더까지만 두드린 상태로 출근해 틈틈이 화장실에서 변신을 꾀하여 점심시간 전에 완벽하게 인간다운 모습이 되기 전 상태를 부르는 말이다. 파우더가 잔뜩 묻은 얼굴에는 눈썹도 희미하고 입술도 아프고 속눈썹에도 눈이 내려 환자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희한하게 아저씨들은 늙었어도 구력이 장난이 아니라 그런지 그렇게 같이 과음하고도 아침이면 누구보다 일찍 나와서 누가 늦나 체크하고 있으니까… 혼나지 않으려면 스즈끼 상이라도 출동시켜야 한다.


“9시 반인데 왜 부장님이랑 석호 씨만 계세요?”


택시 타고 총알같이 날아왔는데 TF팀 일원 중 나온 사람이 꼴랑 둘이라 힘이 빠진다.


“뭐 어차피 어제 다 리허설하고 회식 간 거 아냐. 한 번 대충 보고 상무님 프레젠테이션 들어가면 마무리하고 들어가지 뭐. 다 같이 해장국이나 때리던가.”


“어머 노 땡스. 황금 같은 토요일에 또 뭐 하러 해가 중천일 때부터 붙어 있어욧. 싫어요.”


“흥. 우리도 국적 불명 게이샤랑은 밥 먹기 싫다 뭐.”


상무를 비롯한 다른 인간들도 다 출근하기 전에 이 몰골을 어떻게든 좀 수정해야 할 판이다. 안 부장이 입을 틀어막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준비해 온 도구함을 들고 얼른 화장실을 향했다. 희한하게 분초를 다투며 전투적으로 회사 화장실에서 하는 급 화장이 집에서 하는 화장보다 잘 될 때가 있다. 오늘 좀 그렇다. 대충 인간 꼴을 만들어 자리로 복귀하니 대부분의 직원이 그새 다 출근했고 그 와중에 한 대리는 아침부터 수다스럽다가 나를 발견하더니 예상한 대로 소리를 질러댄다.


“김 대리야!! 진짜 그럴래? 둘이 어디 갔어!! 흠… 옷이 바뀐 거 보니까 집에는 갔나 봐? 아!! 둘이!! 집에 간 거 아냐??”


“그냥 피곤해서 집에 갔고요, 그분은 어찌 되었는지 저는 모르고요.”


“… 진짜?? 흠… 하기야 같이 나간 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이상하게 찝찝한데?”


“아 뭐가 그리 찝찝한데! 그러면 그 둘이 끝까지 밤이 새도록 너네랑 같이 있었어야 하냐?”


다행히 아침부터 업무 처리하느라 힘들던 조 대리가 소리를 질러준 것은 감사하다.


“하여간에 그 둘이 사라지고 우리도 김새서 각자 집으로 찢어졌는데 경미 씨 진짜 웬만큼 취했어야지. 장대마니 얍쌉하게 김 대리랑 튀었다면서 울고 불고… 그러면서 계속 멀쩡하다고 어찌나 고집이 센지. 그래서 끝까지 자기 발로 걸어간다고 저기 북아현동 위에 가구거리? 그쪽에서 세워가지고 걸어갔거든? 잘 들어갔나 몰라. 절대 자기는 안 사귀는 사람한테 집을 가르쳐주지 않는다나? 스토커들한테 질렸다고… 하여간에… 근데 경미 씨도 오늘 나와야 하는 거 아냐?”


“맞을걸요. 오늘 그 대회의실 어렌지 담당이 경미 씨던데… 

상무님이 발표자라서.”


“야, 누가 좀 전화해봐라. 지금 이미 저기 위에 올라가서 음료수 준비하고 뭐 하고 해야 하는 거 아냐? 일단 경미 씨 안 왔으니까 대충 인턴들이랑 한 대리가 가서 좀 봐봐.”


사실 이 아재들이 경미 씨가 회식에 안 와도 신경 안 쓰는… 오히려 안 오기를 바라는 이유다. 주사가 아주 각양각색인 데다가 술 먹으면 정도전 돋아서 온갖 직언으로 아재들 마음을 아리게 하고 다음 날은 뻑하면 펑크를 내기 일쑤라서 그렇다. 오늘 또 그럴 모양인데 그러면 참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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