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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Jun 14. 2024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은 호기심…

(12)

“저 내일 12시 퇴근!

우리 몇 시에 만나용?”


사뭇 놀라운 기술이다. 밀고 당기고 할 것 없이 저런 저돌적인 자세. 배우고 싶진 않으나 상당히 인상적이다.


“저, 경미 씨? 많이 취한 것 같은데 꼭 3차 가야겠어요?”


장 의원이 침착하고도 나쁘지 않은 어투로 대답한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런 말귀 못 알아듣는 에미나이한테 가짜 걱정을 코팅한 말을 건네는 것은 좋지 않은데…


“아니에요! 저 멀쩡해요! 원래 제가 좀 어눌하게 말해서 그런 오해를 하시는 거죵. 참, 참! 아까 김 대리님이랑 밥도 같이 먹고 차도 같이 탄 특별한 사이라고 하셨죵? 이제 저랑도네요. 홍홍홍. 저랑도 고기 같이 먹고 술도 마시고 택시도 같이 타고 히히.”


저런 망할 것이…

나도 유치하게 나는 두 번째라고 공격할까 하다가 참는다. 이십 년이 지난 지금 돌아봐도 잘한 결정이었다.


“좀 똑바로 앉으시죠? 아까 잘 알아보시는 것 같던데… 제 수트 휴고보스거든요. 경미 씨 화장품이 제 어깨에 잔뜩 묻네요. 어제 세탁소에서 찾아온 건데… “


“췻!”


너무도 깊은 발음이라 순간 침 뱉나 싶은 소리를 내더니 드디어 경미 씨가 척추를 세웠다.


“그나저나 지금 가는 곳은 아는데요? 뭐 맨날 바쁘다더니 그런 신장개업한 술집은 또 어떻게 다 꿰고 있는 거래?”


일단 경미를 퇴치한 남자가 드디어 내게 말을 건넸다.


“나 신촌 주민이오.”


“그건 알지. 뭐 그렇다고 신촌 술집을 다 아나?”


“은근 말 놓네? 나 그 술집이 아니라 그 건물을 좀 안다고나 할까?”


“… 넌 나보다 다섯 살 어린데도 말 같이 놓냐?”


“…어…”


“그럼, 그러던가.”


원래 술 좀 먹으면 위 아 더 월드고, 위아래 없고, 그따위 나이차 가벼워진다. 


“오오 이제 우리 반말 타임? 그럼 나도 말 놓는다아…”


“…”


“…”


“췻! 둘이 대꾸도 안 해 주고… 못됐어.”


“경미 씨, 반말하지 마세요.”


“…눼… 김 뒈리뉘임.”


11시가 다 되어가는 신촌은 그야말로 불야성이다.

우리보다 한 발 앞서 도착한 한 대리파가 바람도 안 부는데 자꾸만 몸을 흔들어대면서 대로변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우리나라 술 먹은 취객 교통사고가 생각보다 적은 것은 기적이라고 봐야 한다.


“몇 층이야 김 대리? 앞장서!”


오는 새에 술이 또 다 깼는지 너무도 멀쩡한 한 대리가 재촉했다.


“7층이요. 정말 징하게도 드시네요잉.”


“에이, 왜 그래. 의리없이. 어여 앞장서봐.”


분명히 젊음의 거리 신촌인데 술집마다 아저씨가 그득했다. 포켓 볼 테이블 네 개가 중앙에 있고 한쪽 벽에는 전자 다트 판 몇 개, 그리고 서부영화에서 봤던 주크박스며 테이블 풋볼 게임기, 또 한쪽 편에는 커다란 오픈 냉장고에 얼음 사이사이 꽂힌 색색의 멋들어진 외국 맥주들이 가득하다. 


“자! 상무님이 3차까지는 법인 써도 된다고 하셨어요. 렛츠 파뤼!!”


택시 안의 일로 새침해질 만도 하지만 역시 잊는 데는 술이 최고인 것 같다. 금방 회복된 경미 씨가 회사 카드로 허세를 부린다. 


“역시 맥주는 하이네켄이지!”


초록병에 별이 요란한 독일 맥주를 골라 온 한 대리가 너스레를 떤다.


“이거 그 나라 가면 물보다 싼 거 아시죠? 이게 다 허세라니까. 국산 드시죠.”


“… 내가 이래서 김 대리 좋아해. 참 현명해. 자기 커리어 있지, 잘 배웠지, 생각 곧지. 참 마음에 들어요. 내가 저번에 얼핏 얘기했더니 우리 엄마도 엄청 관심 있어하더라구.”


이건 또 무슨… 내가 당신 이모 아들이랑 잘해보고자 하는데 이 무슨 급작스러운 초침 굿이란 말이오. 절대 심각하게 고려할 사항 아니다. 술 취하면 갑자기 청혼 여기저기 쉽게 하는 남자도 세상엔 깔렸다.


“이모가 좋아할 타입이지. 원래 똑 부러지는 스타일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너 우리 엄마 알잖아. 어찌나 장가 타령인지 정말 미치겠다니까. 일이 이렇게 매일 많은데 어디서 여자를 만나. 그렇다고 선 보기는 싫고, 내 아무리 둘러봐도 우리 김 대리만 한 여인이 없어.”


“저는 결혼 안 해요. 독신주의입니다.”


“에이. 다들 말은 그렇게 하지 뭐. 그리고 원래 그 나이는 그래. 내 이해해. 나도 그랬으니까… 내 한 이년은 더 기다릴 수 있어.”


“지금 뭐 진심이세요? 아님 그냥 아님 말고 식으로 찔러보는 거예요?”


“김 대리 아까 오이 먹느라 정신없을 때 내가 취중진담 불렀는데… 일절도 안 끝났는데 끊어서 나 사실 섭했다. 내 은근 여러 번 힌트 대놓고 줬는데 당신이 자꾸만 못 본 척하잖아.”


“아시네요. 못 본 척. 그런 이유가 있겠지요. 아시면서…”


“췻!!! 이러기야 진짜? 김 대리!”


술 취한 자의 꼬장이 시작되었지만 다행히 여자 로봇이 잘 구슬려 포켓볼을 치러 나간다. 갑자기 저 여자 로봇이 나름 쓸모 있다.


“어떻게 나갈 생각이오.”


남자 사원 둘은 다트게임하러 나가고, 한 대리와 경미 씨가 포켓볼 게임을 시작하자 장 의원과 나만 자리에 남았다.


“둘이 같이 나가면 딱 걸리는 거 알지? 내가 먼저 나갈게. 여기를 일부러 고른 이유. 화장실이 바깥에 있거든. 7층 업소랑 8층 업소가 화장실을 같이 쓰게 되어 있어.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화장실을 가는 척을 할게. 그러면 장 선생은…”


“… 반말을 할 거면 호칭은 오빠라고 해주지…”


그런가…

남자가 정색을 하고 말하니까 갑자기 내가 너무 버릇없었나 싶다.


“그래… 오빠는 그러면, 내가 나간 후 5분 정도만 있다가 나와. 나와서 딴 데 가지 말고 5층 만화방으로 오면 돼.”


“… 너 오빠라고 했다. 마음이 있어야만 오빠라고 한다 했던가… “


“아 뭔 소리야. 이미 반말했는데 존댓말 하기 뭐하니까…”


“어쨌건 난 이제 오빠다. 알았지?”


“…눼…”


“5분 만에 나가면 걸리지 않을까?”


“5분 이상이면 저 인간들이 나를 찾을 거야. 그러면 골치 아프니까 그전에 나와야 해.”


“알았어.”


말을 끝내자마자 핸드백을 고쳐 들고 자연스럽게 화장실을 가는 척 나선다.


“어이… 어이, 김 대리! 어디 가?”


한 대리가 포켓볼을 하다 말고 소리를 지른다. 그럴 줄 알았다.


“아 화장실 가요!! 맥주를 그만 먹게 해 주던가!!”


“가방은 왜 갖고 가!”


“아 그럼, 대리님 사촌만 자리에 있는데 제 가방 거기 두고 오나요?”


“… 어여 다녀와!”


저 인간이 진짜… 누가 보면 남편인 줄 알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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