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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Jun 12. 2024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은 호기심…

(11)

“우리 김 대리가 빙글빙글 부르는 거 한 번 들으면 헤어 나올 수 없어. 마 진짜로 빙글빙글 돈다니까…”


그래… 그런갑다. 헤어 나올 수 없어서 그리도 주구장창 회식 때마다 시키는갑다… 뽕필은 없어서 아저씨들이 좋아하는 트로트는 그저 그렇고 그렇다고 요즘 인기가요를 뽑으면 좋아하는 ‘척’ 하는 게 보이고 그들의 흥을 깨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곡들은 보통 완선이 언니, 나미 언니, 그리고 인순이 언니야의 ‘밤이면 밤마다’ 정도 되겠다.(이건 20년 전이니까 지금 아저씨 혹은 할배들 수준엔 너무 올드할 수도…) 게다가 오늘은 콕 찍어서 ‘빙글빙글’을 부르라신다. 하기사 완전 푸닥거리해야 하는 ‘밤이면 밤마다’ 보다는 나을지도… 눈에 약간의 독기를 품어 앙칼지게 상무를 쳐다보지만 아뿔싸. 깜빡했다. 인간이 취하면 온갖 감각 기관이 무뎌지며 시력 또한 예외는 아니란 것을… 상무의 동자는 이미 텅 비어 있다. 어쩔 수 없이 비비적거리면서 일어나 본다. 빼 봤자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다. 술 취한 자는 고집이 신념인 줄 안다. 배워하는 안무 말고 원래 관절에 리듬감이 얹혀있는 자와 아닌 자는 날 때부터 구분되어 있는데 사실 나는 좀 갖고 태어났다. 잘 보이고 싶은 남자 앞에서 살랑살랑 춤을 추는 것은 부끄럽기 짝이 없었지만 지금 맛탱이 간 미녀를 이기려면 나도 뭐라도 해야 한다. 혼신의 힘을 다해 빙글빙글을 완창 했다. 아무도 내 노래를 감히 끊는 자는 없다. 장 의원이 사뭇 감탄스러운 얼굴을 하고 진심인듯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좀 만족스럽다.


“방장님, 남산 자주 가신다더만 멋지네예.”


으쓱하다. 희한하게 공부 잘한다는 칭찬보다 잘 논다는 칭찬이 기쁘다.


“… 그나저나 내가 탈출하게 도와주면 그 뒤는 나랑 쭉 있는 거요?”


“탈출하면 이 야밤에 집에 가야지 뭔 소리야.”


“… 그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하지. 나랑 같이 도망간다고 약속 안 하면 나 지금부터 들이마시고 뻗어 버릴 거요.”


나도 이런 점이 마음에 안 든다. 분명히 남자가 같이 빠져나간 뒤 아주 멋지게 그럼 각자 집에 가자고 잘 자라고 하면 화가 무진장 났을 것이면서도 말은 저렇게 한다.


“알았으니까 저 술 진드기들 한테서 구하기나 해 봐요.”


“.. 그러면…”


퍽!


맨날 출납 장부 끼고 살아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경미 씨는 취하면 책자 같은 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단란주점이나 노래방에 가면 책이란 책은 죄다 끼고 앉아서 유세를 떨었는데 아까부터 세권이나 끼고 힘자랑하다가 옆 테이블에다가 사정없이 떨어뜨린 모양이다.


“에헤이… 우리 경미 씨 오늘 또 요단 강을 건너셨구만. 한 대리야. 이 분 좀 모시다 드리고… 안 부장은 오데 갔노. 내가 내 정신으로 집 찾아갈 수 있을 때 길 떠나야지. 요즘 같은 날씨에 서울 길바닥에서 헤매다가는 딱 마 객사할 수도 있다이.


안 부장 오데 갔노. 아 거 있나. 이리 온나. 우리는 은자 집에 가자 고마. 우리가 가줘야 이 젊은 청춘들이 따로 좀 시간을 보내지. 김 대리야, 수고했다이. 아까부터 지겨워 죽었을 낀데 이제 마 장 선생하고 둘이 펄펄 날아가라. 장 선생도 이제 오십세주 그만 말아도 된대이… 너무 늦게까지 놀지는 말고, 내일 발표 있는 거 알재? 내가 하는기라도 만들어준 니가 근처에 있어야 마 내가 든든하데이.”


역시… 우리나라 대기업의 상무쯤 되는 분이라면 인성은 몰라도 눈치만큼은 대한민국 몇 등 안에 든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다. 


“아아아, 앙대 앙대요. 이 밤이 아직도 많이 남았어용 엉엉엉”


대부분 술 퍼는 자들의 마지막 수순은 작은 일에 오열하기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꽤 있다. 



“3차 갈 사라아아아암!! 요기 다아 부터라아아앙”


찬 바람 쐬고 살짝 나이가 다시 올라간 경미 씨가 초딩들의 편 먹기 엄지 손가락에 손 붙이기를 시도한다. 시방 저 손가락을 붙드는 것은 절대 현명한 결정이 아닐진대 바보 같은 술 취한 아재들이 신나라 여인의 엄지로 돌격한다. 그 와중에 정신 있는 아재들과 간 안 좋은 아재들은 상감마마의 퇴청으로 마음도 홀가분하니 택시를 잡고 있다. 


“자… 상무 갔고… 이제 남은 인간 중 처자의 앞으로의 회사 생활에 영향력을 미칠만한 파워 아저씨가 있소?”


회식 중 도망치기 가장 좋은 호기는 지금이다. 이렇게 다음 차를 가기 위해 길바닥에서 술 취한 인간들이랑 우왕좌왕할 때… 잠깐 약국…혹은 편의점… 이러면서 옆길로 샌 다음 아 맞다. ‘정하시면 꼭 전화 주세요!!’ 라고 적극, 간절하게 어필한 후… 첫 전화는 무시, 두 번째 전화까지 오면 일단 받고 가고 있다고 안심시킨 후 그 뒤로 핸드폰을 끈다던가 하는 강수를 두면 된다. 다만 어중간하게 취한 상태인데 도망가면 다음 날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을 수 있는 위험도 있다. 그러므로 매우 꼼꼼히 잘 살펴야 한다. 무리 중 별로 뒤끝 안 좋은 인간이 얼마나 취했는지를… 뭐 그런데 지금 남은 인간들 중에 내가 파워로 눈치를 봐야 하는 급은 없다.


“일단 저기에 눈치를 봐야 하는 인간은 없으니 도망을 가고 말고는 우리 능력이에요.”


“눈치 볼 인간이 없다면서 왜 도망가야 되는데? 그럼 그냥 우리 먼저 간다고 하고 가면 되겠네.”


“아니래도… 일단 저들에게 협조하는 척해야 된대니까… 눈치를 보고 자시고가 문제가 아니라고요 지금은. 지금은 저기 저 이미 인간 아니고 로봇화 된 두 남녀! 의원님 이종사촌 형이란 작자와 저기 경리 로봇… 저 둘을 모르니 이런 안일한 소리를 하지…”


“무슨…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에서 성인 남녀가 본인 의지에 의하여 갈길을 정하겠다는데 그 누가 무슨 권리로…?”


“아 진짜로 말귀 못 알아듣네. 살면서 술 진상 한 번도 본 적 없어욧?? 그럼 함 해보던가. 흥!”


술 로봇들은 의외로 치밀하다는 것을 이 인간은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을 퇴치하는 법이란 방심할 때 뒤통수 치기가 최고인데… 그들에게 미리 의심과 경계의 여지를 주면 안 되거늘… 아무리 봐도 이 남자는 공부 말고 다른 것들을 한참 배워야겠다.


“저기 형진이 형! 그럼 상무님도 가셨고 하니까, 우리는 좀 따로 가 볼게.”


그 우리가 나를 포함한 것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전지적 관찰자 입장에서 이 상황을 보게 되는 이유는 곧 알게 된다.


“뭐라고?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는데? 자슥아. 내가 분명히 남의 회식에는 왜 오냐고 처음부터 말했었지. 이젠 끝났어 이 놈아. 넌 우리랑 지금 운명 공동체야.”


희한하다. 회식한다고 하면 ‘예이!’ 하고 기뻐하는 인간 거의 없고 ‘또?…’ 하면서 피곤한 티 팍팍 내던 인간들인데도 1,2차를 거치면서 절대로 이 밤을 허투루 보내선 안된다는 듯 3차를 도모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연하죠! 가긴 어딜 간다는 거에용?? 것도 둘이서망??

 장슨생니이이임! 저랑 아직 얘기 안 끝나셨잖아용!! 그렇게 맛없는 캔커피 저한테 버리셨었으니까! 

제대로 된 맛~있는 커피 청담동에서 사주세용!!!”


저 여인… 가만 보니까 많이 안 취했거나 찬바람에 정신이 갑자기 들었거나… 순간 느긋했었는데 의원 데리고 얼른 탈출해야겠다는 의지가 솟는다. 자고로 예쁜 애가 정신 차리고 자꾸만 장시간 미모를 보여주고 있으면 안 흔들리기가 힘들 테니. 내가 힘을 쓸 차례다.


“한 대리님. 3차 어디 갈 거예요?”


“응? 어디 갈래? 파전에 동동주?”


“아 진짜… 배도 안 불러요? 뭘 밤을 새서 계속 먹재요.”


“맞아… 한 대리님 진짜 취향 냄새나… 그런 노땅들 가는데 말구요, 좀 신나는데 가용!!”


역시 세상에서 제일 거침없는 경리 경미 씨가 올곧은 소리 한다.


일단은 퇴로를 확보하고 성공적으로 탈출하기 위해서는 익숙한 곳으로 유인하는 것이 맞다. 


“것 봐요. 경미 씨도 그러잖아요. 신촌 어때요? 

거기 새로 생긴 건물에 수입 맥주 바 괜찮던데. 포켓볼도 있고 안주도 괜찮아요. 거기 족발냉채 진짜 맛있어요.”


평소 포켓볼을 치는 본인의 몸매에 굉장한 자신감이 있는 경미 씨와 (괜찮다. 저 여자가 제대로 몸매 자랑하기 전에 장선생을 빼돌릴 생각이다.) 하루 종일 먹어도 또 배고픈 한 대리 두 핵심 진상을 공략한 제안은 두말할 것 없이 바로 수락된다. 또한 장소가 종로에서 이동을 해야 하는 신촌이란 소리에 강남 저쪽 편에 사는 승근 씨랑 차 대리, 장호 씨 등등이 우수수 3차 의지를 쉽게 접는다. 결국 한 대리, 경미 씨, 신촌에 사는 조 대리, 오늘 밤 조 대리 원룸에 꼽사리 낄 예정인 주안 씨 그리고 나와 장 의원이 남는다. 인생 심심하고 외로운 거 알지만서도 좀 작작하고 집에들 좀 가라. 의무 회식 시간도 끝났는데 가족도 아닌 우리끼리 왜 이러냐… 허구한 날… 


장 대만 씨가 내 만류 안 듣고 쓸데없이 적들에게 전략 노출한 바람에 우리 양옆으로 술 취한 인간들이 겹겹으로 싸고는 물 샐 틈 없는 경호를 펼치고 있다. 누가 보면 우리가 꽤나 중요한 인간으로 보였겠다고? 뭐 그렇진 않다. 연말 종로 바닥에선 흔한 경호니까. 주로 3차를 거부하는 일행을 다른 일행들이 겹 싸고 연행하는 꼴은 깔렸으니까…


두 남녀 술봇들은 치밀했다.

셋씩 나누어 탄 두 택시에는 남 녀 술봇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역시 나누어 감시자로서 동승했다. 그리고 우리 택시에는 예상했겠지만 여자 술봇이 탑승했다. 이탈자는 용서 없다는 듯 우리 둘을 밀어 넣고 마지막으로 장 의원 옆자리에 밀착해서 탄다. 예상했던 행동이지만 거슬린다. 그다지 좁지도 않은데 자꾸만 밀어대더니 장 의원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코감기가 잔뜩 든 듯한 목소리로 찡얼 대기 시작했다.


“장 선생니임. 여자 친구 없다면서요? 병원도 그만두셨다면서요? 무~~지 심심하시겠어용. 저도 남자 친구랑 깨져서 세상 심심한데… 저한테 커피 사 주실 거죠잉?”


장 선생의 즉각적인 대처가 시급한데 팔짱만 끼고 중앙에 앉아서는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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