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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Jun 10. 2024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은 호기심…

(10)

순순히 보내 줄 아재들도 아니거니와 아직도 내일 프레젠테이션 얘기를 한창들 하는 걸 보니까 덜 취했다. 병원 회식은 어떤가 모르겠지만 일반 대기업 회식에서 겨우 2차 왔는데, 것도 졸자가 개인 사정 운운하면서 엉덩이를 불미스럽게 떼는 짓은 심각한 하극상이다. 장 선생은 29년 살면서 모르는 게 연애 말고도 수두룩해 보인다. 대충 인생을 갑의 길로만 걸어온 자들이 이토록 눈치 없는 밉상으로 거듭나곤 하는 것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오. 기다리시오… 적어도 이 테이블 인간들은 전사를 해야 기회가 생길 것으로 사료되오.”


“역시… 잘 알고 계시는구랴. 그라믄 내가 함 힘써 보겠소. 보자… 이 테이블이라… 나의 헐랭이 사촌 형은 제껴도 되니까… 그런데 나머지 셋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구랴.”


남자가 귓속말로 은밀하게 사극을 시도했다. 맞장구를 쳐주니 좋아한다. 사실은… 물론 이 인간들이 다 전사하면 갈 수야 있겠지만 그건 이론일 뿐… 저 인간들이 회식 2차 따위에 굴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냉정한 현실은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왜 니 사촌 형은 빼고 시작하냐. 그 인간이 제일 대왕 말미잘인데… 아까 못 들었소? 새벽 세 시에 대로 한복판에서 어쩌다가 어묵 싸대기를 맞았는지를…


“상무님 저와 한 잔 하시지요. 이 집은 오십세주는 안 파나?”


나그네 의원이 드디어 팔을 걷고 뭔가를 시작했다. 이 남자가 반드시 이 회식에서 나와 함께 탈출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듯하다.


“상무가 좀 약한 술은?”


라고 방금 남자가 귓속말로 물었을 때 내가 고급 정보를 이미 흘려준 상태. 자고로 섞은 술은 위스키도 이긴다.


“오십세주에 좀 빨리 맛이 가는 경향이 있소. 한두 잔 꺾으면 본인 고향 말만 쓸 것이오. 그 상태부터는 급물살을 타게 되오. 30분 내에 상무를 택시에 태워 고향 아니 삼성동 자택 앞으로 ~ 시킬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되오.”


말하면서도 씁쓸하다. 보통은 가장 내밀한 측근인 마누라 정도가 알아야 할 정보를 탑재하고 있다는 것은 대체 일 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사생활 없이 강행되는 회식이 몇 번이었겠냐는 것이다.


사실은 상무가 레벨 1이고 상무 가면 안 부장은 1+1. 문제는 가장 질기게 갈듯 말 듯 안 가는 한 대리, 너의 이종사촌과 그리고 그의 소울 메이트 경미 씨라는 것을 말할 수 없다. 선생님… 장 선생님… 제일 늙고 높은 상무만 처리하면 되겠거니 하는 안일한 생각 중인 장 선생님…. 인생이 그리 호락호락한 게 아니여라…


“근데 상무님요, 이리 자주 회식하고 늦게 들어가시고 해서 사모님 열받게 하시면은 사모님 심장하고 뇌 건강에 안 좋습니데이. 일단 한 잔 받으시소.”


주방에서 핸드메이드 된 오십세주가 도자기 주전자에 담겨 도착하자 장 선생이 재까닥 상무에게 권한다.


“오데, 언제는 우리 마누라 심장 약한 거 유전이라매. 

그래가 딸내미도 정기 첵업 해야 한다고 장선생이 그래따이가. 내가 술 쪼매 마시는기랑 우리 마누라 건강이랑 뭔 상관이라꼬.”


장 선생이 상무의 대답에 은근슬쩍 미소로 답하면서 나를 돌아본다. 눈에 물음표를 띄우고…


‘잘하고 있소. 모촌어 튀어나왔고, 본인 책임은 아무것도 없다는 식의 배 째라 투정 또한 좋은 징조요.’


‘흠 흠! 상무님, 섭섭하네요. 보통 회식 땐 저랑 제일 많이 얘기하셨었는데… 오늘은 장 선생님한테 홀딱 빠지셨네요^^ 홍홍홍”


“… 내 마 방금 장 선생이 줘서 급히 꺾었는데…”


하면서도 내 잔을 거부하지 못하는 회식의 상감마마는 보아하니 곧 퇴청하시겠다.


“힉!! 이 뭐꼬!!”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순조로이 한 분을 먼저 퇴근시키려는 찰나에… 


“…. 늦었어 이미 난 네 여자야

오오오오오오오오 독한 여자라 하지 마.”


한겨울에도 킬힐을 고수하는 경미 씨가 노래를 제대로 살려보려고 오리지널 안무에 사용되는 부채 대신 노래방 책을 양쪽에 펼쳐 들고 이정현의 중국스러운 코디 부분은 아쉬운 따나 두루마리 휴지를 이마를 가로질러 둘렀다. 중국 여자 무술 고수 이런 거 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냥 보기에 두통 잔뜩 돋아 보인다. 


“이 아가씨 오늘 와이카는데… 누가 니를 독한 여자라 칸다고 이 무신 날벼락이고 고마!”


이미 상무보다 많은 단계 진전된 경미 씨가 열창 중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상무 무릎에 불시착하면서 손에 쥐고 있던 잔도 떨어뜨려 바지에 날벼락을 맞은 상무가 갑자기 너무도 또렷한 발음을 구사하고 있다. 두꺼운 노래방 책 두 권도 상무 배를 가격했는데 일단 알코올기로 아픔은 못 느끼는 상감마마가 그 부분은 많이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


“오오오오오오 사랑했으니 책임져 흐흐흐흐”


그런 와중에도 가사는 놓칠 수 없다는 듯 경미 씨는 제대로 일어서려 노력하며 열창한다. 민망한지 웃었는데 애교 단계 지나 좀 희한한 단계인지 웃음소리가 사뭇 소름 끼쳤다.


“오오오오 오오오오오 ~~~”


한 발 늦게 도착한 한 대리 코러스가 가수를 부축해서 다시 스테이지로 데리고 간다.


“아이 참! 한 대리니임! 저 제 노래에 무단 침입하는 거 무지 싫어하는 사람이고든요?? 마이크 이리 내놔요, 아 내놔요오오. 아 부르지 마요 쫌. 으아아아”


나는 왜 갑자기 저 여인의 내일 아침이 걱정이 되는 걸까. 우리는 토요일 오전 근무가 있는 회사를 다니고 있는 중인데 말이다. 지금이라도 내가 한 번 슬쩍 언질을 주어야 하나… 내일 일토라고…


“거 맞는 소리네. 한 대리야. 니 그 코러스 좀 작작 넣어라. 니 목소리 때문에 내 목소리 안 들릴 때 너무 많아. 마 그라지 말고, 우리 장 선생님 한 곡 해보입시더. 테이스트가 우째 되는지 마 궁금하네.”


아…

고백하자면 난 좀 이상한 취향이 있는데, 보통 노래 잘하는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여자들이 많지만 나는 노래 잘하는 남자 별로다. 아니 솔직히 내가 마음에 두는 남자가 내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게 그렇게나 닭살 돋고 싫을 수 없다. 왜냐고 묻는다면 이유를 말할 수 없겠다. 그냥 그렇다. 그런데… 상무가 장 선생한테 노래시키고 난리다. 안 불렀으면 좋겠는데…


“한 잔 시원하게 같이 해주시면 미천하지만 한 번 뽑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열 잔이라도 같이 하지!”


이미 상무는 ‘물 술술술’ 단계다. 즉, 물도 술이요, 술도 술이다.


‘이미이 와 버린 이별인데

슬퍼도오오 울지 … 말아욧!!’


옷… 선곡 살짝 참신. 

발라드 아니라서 마음에 들고 희한한 김경호나 김종서 파 아니라 다행스럽다. 적절히 구성지면서도 철학적인 가사. 나훈아를 선택한 것은 괜찮았다.


“오… 젊은 사람이 아주 운치 있네.”


상감마마가 흡족해하신다.

거푸 오십세주를 들이켜시면서 지금 한 오백 살은 찍으신 것 같다.

노래를 부르는 남자의 모습에 전혀 흔들리지 않지만 지금 저 남자의 굳건한 정신력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우측에는 콧구녕 두 개에 휴지를 다 말아 넣은 한 대리 로봇과 좌측에는 미역인양 흐물거리고 있는 귓구녕에 휴지를 안테나처럼 꽂은 경미 양이(참 뜬금없지만 그러고 보면 두루마리 휴지는 참으로 쓰임이 다양한 필수품이다.) 곡조와 상관도 없는 탈춤을 추는데도 흔들림 없는 여유. 꼭 잘 부르는 편은 절대 아니다. 그렇다고 음치도 아니지만 그저 그렇다. 그래도 트로트를 대하는 데 있어 기본인 뽕필 하나는 충만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트로트를 좀 멋들어지게 부르는 남자는 괜찮게 보기도 하나 보다. 아저씨들 사이에만 끼어 있다 보니 보는 눈이 다르게 발달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고… 마 의사 안 했으면 가수 했어야겠네. 거 누고, 서울대 치대 나와 갖고 가수 하는 잘생긴 총각 있잖아. 그리 되었을 수도 있겠네.”


“에이… 그 사람은 잘 생겼는데… 그리고 장 선생님 노래 그냥 그런데에”


남의 말 안 듣고 이제부터 본인 하고 싶은 말만 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표명하는 꼬락서니인 귓구녕에 휴지 말아 넣기를 지속하고 있는 경미 씨가 나타나서 아주 깨소금 같은 진리를 설파한다. 저러다가 내일 출근 대신 이비인후과 가는 거 아냐… 그렇다. 그 혼성듀오 서울대 출신 남정네는 좀 생겼다. 내 타입은 아니지만. 장 선생은 그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살짝 내 타입이다. 하여간 경미 씨가 마음의 소리와 사회를 향한 소리를 구분 못하는 최고 정직 단계까지 도달했다. 저 여자 오늘 집은 잘 찾아갈라나 정말 걱정스럽다. 몇 달 전 회식에서는 집이 신촌인 내가 아현동 사는 저 여인을 떠맡아 데려다주었어야 했는데 그 야밤에 아현동을 몇 바퀴를 돌았는지… 그 사이 택시 아저씨한테 껌 하나만 달라고… 아저씨가 정말 미안한데 마지막 걸 좀 전에 씹어서 없다고 하니까 없는 껌 내놓으라고 울어대질 않나… 결국 집 찾기 전에 택시 아저씨가 편의점에서 껌 사 와서 통째 주니까 집을 알려주는 그런 만행을 저지른 여자임. 저 여자가…  이래저래 오늘 장 의원이 나를 반드시 이 회식이 끝나기 전에, 저 여자가 집을 걸어가던 기어가던 내 알바가 아닐 수 있도록 구출해야만 한다. 백마 탄 왕자가 별거냐. 내 이 혼란스러운 현실에서 건져내 택시 태워 평화로운 곳으로 데려가면 당신은 의원에서 왕자로 승격이오. 중인에서 왕족이 된단 말이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니 부디 잘 거머쥐기 바라오.


“자, 자, 김 대리야, 리모콘 운전 그만하고 어서 한 곡조 해 보소.”


제발… 오늘만큼은 저 의원도 있는데… 이제 두 번째 봐서 정말 어색하고 이상해 미칠 것 같은데 노래 따위는 시키지 않았음 했다. 하지만 아저씨들은 정말 냉정하고도 이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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