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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리도 언어라 그런가. 연습해서 많이 매끄러워진 장 선생이다. 장 선생은 강일이 오빠가 자연스럽게 오던 대로 같이 가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까마귀 뒷자리에 찰떡같이 올라타는 것에도 괘념치 않았다.
“자, 올라갈 때는 형님 취향대로 한 번 들어 볼까예?”
“에이, 오데예, 탑승자들이 즐거워야지예. 운전수가 뭐…”
“어허 아니라예. 운전하시는 분이 기분이 삼삼해야 무사안전한 주행되지 않겠습니꺼. 형님의 취향을 배워보겠사와요.”
엉뚱한 소리지만…
나는 사극을 유독 좋아한다. 말도 안 되게 역사를 왜곡한 망가 같은 사극 몇을 빼고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사극을 섭렵했다. 그렇게 수많은 사극을 섭렵하고 내가 알아낸 진리는 여러 가지지만 그중 하나란, 세상에서 가장 처세에 능하고 사람 심리 잘 보고 요리조리 권력과 그 밑 딱 고 사이에 껴서 잘도 살아나가는 천하의 처세꾼이란 바로 이방이라는 것이다. 정해진 셀러리는 쥐꼬리라 하더라도 실상은 분명 사또보다 알부자였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예리한 촉이다. 뭐 그렇다고… 우리 강일이 오빠는 분명히 전생에 이방이었을 거라고…
“뭐 사실 난 운전을 자주 하진 않지만 운전을 할 때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걸 꽤 즐기긴 하지요. 마 그라믄 우리 운명 공동체들에게 제 소소한 취향 한 번 공유해 볼까예?”
라고 말을 마친 후 장 선생이 선보이는 음악들은 장엄하기 짝이 없는 바흐의 명곡들이었다. 순식간에 차 안을 성스러운 바티칸으로 이동시켜 버리는 명곡의 향연… 좋은 차는 우퍼도 어찌나 좋은지 볼륨을 조금 높이자 그 황홀한 사운드가 온몸을 감싼다.
“아… 가사가 없는 노래를 좋아하시네예?”
아… 부끄럽다. 저 인간.
“지는 베토벤 보다는 모짜르트가 좋더라구예.”
“나도 그런 편입니다.
베토벤 보다는 모짜르트, 슈만보다는 슈베르트 그런 편이지요.”
“아… 저랑 같네예. 지금 모짜르트가 없는갑지예? 뭐 없으면 지금 듣는 베토벤도 개안습니다.”
바흐라고… 인간아… 뭐 좀 묵직하고 무섭고 심각하면 다 베토벤인 줄 아는 거여?
“음… 모짜르트도 거기 어디 있을 텐데.. 어이, 김 대리야. 조수석 서랍 좀 열어보지?”
장 선생은 굳이 니가 지금 듣고 있는 것은 베토벤이 아니라 바흐라고 지적하는 대신 모짜르트를 찾으라 했다. 모짜르트의 작은 별이나 자장가 빼고 저 인간이 뭘 아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모짜르트 할배랑은 좀 안면 있다 하니 친절하게 그걸로 바꿔 틀어준다.
“어머, 이 씨디에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연탄곡’도 있네? 이건 드문 피스라 잘 없는데…”
“오… 너도 그 피스 좋아하는구나? 합이 맞는 두 피아니스트가 완벽한 공연을 하면 정말 전율이 돋는 명곡이지. 그거 있는 씨디 틀어볼래?”
모짜르트를 듣다 보니 자연스레 피아노 학원을 다니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게 된다. 물론 나는 개인교습은 꿈도 못 꾸고 동네 골목 안집이라고 불리던 사설 피아노 학원을 다녔었지만 평범한 지방 음대를 졸업하고 애초에 장래 희망이 피아노 학원 원장이었던 내 선생님은 본인이 아는 것만큼은 백 퍼센트 전수하는 자가 진정한 사부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강호의 고수였다. 물론 장 선생은 그런 세계를 모른다. 처음부터 음대 교수에게 개인 레슨을 받았었다는 그는 나의 무림 강호 스승의 이야기를 필요 이상으로 재미있게 들었다.
“어쨌건, 그렇게 선생님이 애를 써도 나의 손가락은 늘어나지 않았어.(손이 워낙 작아 손바닥 사이에 가는 막대기를 하루 종일 끼우고 엄지와 새끼손가락 사이를 최대한 늘리던 이야기를 막 한 참이었다.) 브람스와 베토벤이 안 되면 서울대는 가망이 없단 것을 알았을 때 나는 피아노를 관둬야 했거든.”
“잘 된 거야. 정말 피아노로 서울대를 갔다면 넌 더 처절하게 싸웠어야 할 거야. 모두가 한 곳을 바라보는 데에 껴 있는데 그 기회가 불가능에 가깝게 적다는 것을 아는 것만큼 절망스러운 것도 없으니까…
인간은 ‘의지’라는 말을 만들어낼 만큼 노력만 한다면 뭐든지 되는 양 착각하는 경우가 많아. 노력을 해서 되는 게 얼마나 되니? 어떤 분야의 천재는 타고나는 것이고, 그 타고난다는 것의 최악의 저주란 유전자야. 그 유전자라는 것은 또한 무서워서 태어나 단 한 번도 담배를 안 피운 사람이 폐암으로 죽는 경우가 생각보다 허다해. 아버지가 담배를 펴서 폐암에 걸렸던 거라 믿던 자식은 평생 담배 연기를 쥐 보듯 징그러워했지. 당연히 입에 단 한번 대 보지도 않았단 말야. 하지만 그 남자는 결국 자신의 아버지가 생을 마감했던 때와 비슷한 40대 중반에 일찍도 세상을 뜨게 되는 거야…. 힘 빠지지만 인간의 의지로 이겨낼 수 있는 게 그렇게 많진 않아.”
“맞습니더. 우리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 그리고 우리 아부지… 싹 다 40 넘어서 허물 벗듯이 머리카락들을 시원하게 벗어던지셨다아입니꺼. 마 이런 상황에서 제가 가질 수 있는 의지라 해봤자, 나도 40대 되면 머리카락을 벗어야겠다라던지… 뭐 아님 머리를 심거나, 가발을 구비해야겠다. 뭐 이 정도 소소한 의지밖에 안 되겠지예.”
“… 그래도 대머리는 죽는 병은 아니니까…”
장 선생은 강일이 오빠의 말에 대꾸 없이 한참 침묵하다가 알쏭달쏭한 소리를 했다. 피아노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유전병으로 죽는 경우에 대한 무력함으로 결론이 났다.
“…그런데 오늘 금요일이고, 지금 서울 도착해봤자 거의 저녁 다섯 시쯤 되는데 그때부터 일할 것도 아닐 테고… 내일은 노는 토요일이지? 김 대리?”
“그렇긴 한데… 내가 까칠해 보여도 막상 저 아저씨들을 거역해 본 적은 없어서… “
“일 잘하는 을은 당당해도 된단 말이야. 지금 안 부장한테 전화해. 워크샵도 끝났으니까 푹 쉬고 월요일에 뵙겠다고.”
뭐 그렇다. 그러잖아도 다시 종로에 집결을 해야 하나… 피곤한데 신촌으로 새야 하나 고민 중이었다.
“그렇다고 신촌에 데려다줄 건 아냐.”
장 선생이 갑자기 눈을 반짝이면서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며 할 말을 궁리 중인 나를 쳐다본다.
“아… 서울에 들어서기만 하면 아무 데나 저 오빠랑 같이 떨궈줘. 알아서 갈게.”
“… 무슨 소리야? … 일단 부장한테 전화부터…”
“알았어… 워크샵 충실하게 했음 되었지 또 무슨 뒤풀이야… 내 그리 당당하게 말할 거…
아! 여보세요? 부장님? 저 김 대린데요… 아무래도 제가 몸살에 걸렸나 봐요. 하도 눈 밭에서 굴렀더니… 네… 월요일 이상 없는 출근을 위해 지금 이 시각부터 푹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네네… 월요일에 뵐게요. 들어가세요.”
“엇.. 봐봐… 너 몸살 기운 있어?”
당연히 둘러댄 말일 줄 알거라 생각했는데 장 선생은 운전대를 잡던 손을 떼서 내 이마를 짚어본다.
“열은… 모르겠는데.. 그 앞에 서랍 보면 체온계 있어. 한 번 재볼래? 열 오르면 안 좋은데…”
“에헤이.. 우리 장 선생님, 어려운 사회생활은 안 해보셨는갑네예.
사람은 누구나 아프지예. 그런데 직장 생활하거나 교수 따까리 하거나 하면 더 자주 아픕니다. 딱히 안 아파도 자주 아프게 됩니더. 뭐 그런 게 있어예.”
“아… 하하하. 결국 대 놓고 내가 워크샵까지 따라갔는데 갑들 뒤풀이까지도 가야 돼! 이런 말은 못 하는 거네?”
“… 그라지예. 아직도 그 화상들을 한 석 달은 더 봐야 안 합니꺼.”
꽃 피는 3월이 와서 나비가 날기 시작하면 나도 나비들과 같이 날아서 다시 여의도 본사로 돌아갈 수 있으려나…
“자, 그러면 꾀병이었다는 좋은 소식이었고요, 우리는 서울로 가지 않는다!”
이건 또 무슨…
“마 지는 어디를 가건 형님이 가자시면 기꺼이 갑니다만 그래도 오데를 가는지는 살짝…”
“원래 계획에 강일이 오빠야는 없었지만 그런 건 큰 문제 아니고, 셋이면 더 재미있을 거야. 김 대리, 기억 안 나? 빙어낚시하기로 했던 거? 강원도 온 김에 빙어낚시도 좀 하고, 속초 넘어가서 회도 좀 먹고… 그리고 내일 아침쯤에 서울 올라가면 괜찮지 않아?”
그러고 보니 워크샵 때문에 정신이 없었지만 제주도에서 남자가 빙어낚시를 가자고 했었던 것이 생각났다. 단 둘이 오붓하게 덜덜 떨면서 빙어낚시를 할 세상 로맨틱한 기회는 망할 불청객으로 좀 오염되었지만 그래도 뭐 상관없다. 오빠야랑 더 시간을 보낼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