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 선생니임! 저 스키 가르쳐 주세용!”
그래. 스키장에서 스키타자는 게 죄는 아니지. 그런데… 엄청 잘 타는 주제에 못 타는 척하는 건… 저건 사기범죄 아닌가? 사나운 눈빛으로 하는 말을 들었나.
“김 대리님! 김 대리님도 복학생 오빠랑 같이 타러 가요!”
나더러는 강일이 오빠랑만 가란 건지 아님 자기네랑 같이 가잔 건지 애매한 소리를 하고 있는 저 여인은 어젯밤에 분명히 나랑 거의 밤을 새웠는데 피부가 아주 찹쌀떡 같다.
분명… 술이 덜 깬 것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다.
안 하던 짓을 갑자기 하고 싶었던 이유란.
“장 슨생뉘이이임… 저도요! 저도 키스…. 웩… 아니 스키 가르쳐 주세요.”
미쳤나. 황급하게 정정해 보지만 어설픈 따라 하기 애교의 종말은 처참하다.
“말 헛 나온 거! 절대 헛 나온 거…”
진짜 이 순간 로켓으로 변신해서 우주 끝까지 그냥 날아가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한 나머지 어떻게든 잘못 튀어나온 말이란 것을 강조하고자 촌스럽기 짝이 없는 몸짓으로 강하게 부인을 해본다.
“어머 어머! 김 대리님!! 실수 아닌 거 같은데? 세상에… 너무나 적극적이시다아. 어쨌거나 우리 얼른 스키 타러 가요오!! 술고래들 잡으러 오기 전에.”
꼭 한 번 저렇게 씹어야 맛이겠지. 허허. 그러려니 하련다..라고 생각하는 찰나였다.
“가르쳐 달라면 당연히 가르쳐 드려야죠. 그 나이 먹도록 아직 제대로 못 배웠다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파악하려고 노력 중인데 이미 그의 입술이 숨 막히게 다가왔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도 있는데, 여기가 강원도가 아닌 알프스 인양… 제대로 된 딥키스도 아닌 짧은 입맞춤이었지만 볼 사람은 다 보고야 말았다.
“… 세상에… 진짜 … 그런 거예요? 둘이? 어머… 장 선생님 그렇게 안 봤는데… 만나기도 나랑 먼저 만났으면서…”
그의 스스럼없는 입맞춤에 오히려 조용해진 것은 사람들이었다. 샐쭉해진 경미 씨가 앙칼지게 말하고 휘적휘적 자리를 떠난 것은 그렇다 치고, 한 대리도 진짜 반은 내게 마음이 있었던 모양 기분이 상해 경미 씨와 다른 방향으로 사라진 것도 그러려니 하겠는데 남매만큼 친한 강일이 오빠마저 시무룩해져서 우리만 내버려 두고 자리를 뜬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 말실수인 거 알면서…”
“기회를 놓치지 않는 똑똑한 남자니까… 나는.
아! 그 기회라는 것이 너의 말실수도 있지만, 하이에나들에게 선을 좀 그어줄 좋은 기회였다고 해두자. 봐봐, 저기 암컷 하이에나 하나랑 두 수컷이 바로 해산하는 거…”
이 남자는 대부분 유쾌하고 자신감이 넘친다. 한 마디로 본인 하고 싶은 대로 살아온 티가 줄줄 난다.
“우리도 올라갈까?”
스키를 딱히 배우고 싶은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인간들이 모여 있는 곳까지 안 나타나면 그야말로 뒷소리를 들을 판이니 내키지 않는 걸음을 따라 했다.
“세상에는 잘하기 전엔 재미있는지 모르는 것들이 꽤 있잖아.
스키도 그중 하나야. 웬만큼 타게 되면 아마 매년 겨울이면 스키 타고 싶어 몸살이 날걸?… 아, 이제 키스도 그러려나?”
남자가 짓궂게 놀리듯 웃었지만 아직도 빨간 볼이 가라앉지 않아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장 선생은 취미가 운동이랬다. 고 3 때도 새벽 수영장을 거르지 않았다며 공부 잘한 것보다 그게 더 자랑이랬다. 스키도 꽤 탄다고 계속 개인지도를 하겠다고 친절을 드높이는데 사실 이 남자는… 은근히 둔하다. 여자가 마음에 있는 남자 앞에서 벌러덩 대책 없이 넘어지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지를 모르는… 그것도 방금 입맞춤 한 남자 앞에서…
남자 앞에서 두 시간을 끝도 없이 슬랩스틱을 펼쳤다. 발레 전공자도 아닌데 다리 찢기도 보여주고, 곰도 아닌데 재주도 몇 번이나 구르고, 몇 번이나 원하지 않는 곳을 향해 달려가는 나를 남자가 때마다 구해주고, 터지게 담은 가마니처럼 둔한 몸을 못 일으켜서 마구 안기고… 만신창이가 되다시피 개인교습을 받는 동안 다른 인간들은 우리 근처를 오지 않았다. 남자의 입맞춤은 다른 이들을 퇴치하는 적절한 대책이었음을 알게 된다. 저 멀리 할부를 몇 개월을 끊었나 궁금해지는 경미 씨의 분홍 샤넬 고글을 중심으로 한 대리, 강일이 오빠가 능숙하게 활강하는 모습들이 보이지만 그 먼 곳에서도 느껴졌다. 그들 중 누구도 제대로 즐기고 있지 않다는 것을…
“편해졌지?”
“응? 뭐가?”
“온갖 못 보일 꼴을 다 보였으니까. 하하. 진짜 다리를 잘 찢던데 처음 찢은 거 맞아?”
“아! 진짜. 저 위에서 일어난 일은 다 잊도록 하시오!”
“왜 잊어. 진짜 웃겼는데… 그래도 편해졌잖아. 아냐?
원래 고기쌈을 있는 대로 싸 먹거나, 몸을 쓰면서 어설픈 모습을 보이고 나면 한결 편해지는 법인데.”
“뭐… 아니라고 말할 순 없겠수. 그런 의미에서 오늘 회식은 고기였음 좋겠다.”
“늘 말하지만, 먹는 것을 좋아한다는 점이 아주 큰 매력이야.”
갑자기 느꼈다. 남자랑 어떤 말을 해도 이제는 불편하지 않다.
어쩌면 그의 지론이 맞을지도 모른다. 치부를 적당히 보이는 것은 분명히 가까워지는데 도움이 된다.
“흥! 둘이 또 따로 어디 숨어서 뽀뽀나 하는 줄 알았더니, 스키 잘 타셨어요?”
대체 이 여인이 왜 화가 난 것인지 아까부터 이해해 보려 노력 중이지만 이게 무슨 땅에 떨어진 돈 줍는 것도 아니고, 먼저 본 사람이 임자라는 심보가 남자에게도 통하다니… 이해 불가다.
이럴 거면 가까운 서울 소주방으로 워크샵을 갈 일이지… 대체 스키장으로 워크샵을 온 이유를 의아하게 만드는 아저씨들의 릴레이 술 잔치. 용왕님 병구완을 해야 했던 거북이는 토끼를 찾을 게 아니라 저 강철 간을 가진 한국 아저씨들을 물색했어야… 곧 인수인계 회의라 해서 들어간 회의장은 이미 조금 알딸딸하고 들뜬 기분이다. 을이지만 내가 들어서면 다들 희한하게 눈치를 본다. 핵심적인 을은 갑 상사도 이기는 법이다.
“에이, 또 또 그렇게 새끼 뺏긴 고양이 눈을 하고서는…
걱정 마시랑께. 제정신으로 교육은 잘 들었잖오. 이제 인수인계만 화기애애하게 정해보자고.”
어차피 누구나 알고 있다. 공식적으로 한 대리와 민호 씨가 담당자가 되겠지만, 민호 씨가 적어도 3년은 이 시스템을 꾸려야 한다는 것을. 그래도 형식적으로 한 대리, 민 대리, 성 대리가 후보로 올라 있지만 그중 가장 연차가 짧은 한 대리가 맡게 될 것이고, 그러면 한 대리 거머리는 일 잘하는 신입 민호 씨를 쓰겠다고 하고, 그러므로 민호 씨는 이 예산 시스템의 감옥에 3년 당첨.
그리하여 오후 네 시에 시작된 인수인계 기념 파티는 맡긴 자들은 홀가분함에, 맡은 자는 씁쓸함에 거푸 술잔을 기울이며 영양가 없는 워크샵의 대미를 장식하게 되었다.
“김 대리는 남자 친구 차로 올라가지? 오늘 아직 금요일이니까, 종로에서 다 다시 집합하는 걸로?”
정말 징글징글하다. 물론 영업일이 맞으니까 싫다고 말할 수도 없다.
“오늘 업무 안 하잖아요?”
“어허, 뒤풀이도 업무의 연장인 거 모르나? 아직 중요한 업무가 남았잖아. 뒤. 풀. 이”
“역시 대한민국 사회란 어디나 똑같구만. 교수들도 학회 끝나면 어린 학생들보다 더 팔팔해서는 그놈의 뒤풀이 타령인데… 쩝.”
강일이 오빠는 어제 눈 앞에서 후배의 뽀뽀 사건을 목도한 이후로 이상하게 어색을 떠는가 싶더니 속은 모르겠으나 멀쩡한 척을 하고 있다.
“병원도 마찬가지랍니다… 결혼을 하면 귀가하기 싫은 병에 단체로 걸리나 보죠.”
장 선생이 결국 대한민국 사회는 다 똑같다는 류의 증언을 보태고 까마귀 세단을 끌고 나타났다.
“자, 경상도 분들은 이 차로…”
“거기 복학생 오빠야!! 눈치 없게 거기 왜 껴요. 저랑 같이 한 대리님 차로 가요.”
“맞아요, 강일 씨. 그 불타는 커플이 가다가 버릴지도 몰라요. 어여 이 차로…”
“아닙니더. 경상도 싸나이 의리가 있지예. 후배랑 같이 갑니다.”
뭐 굳이… 의리 안 지켜도 되는데…
하지만 속마음을 꺼내진 못했다.
“오빠야, 의리가 깊네예?”
“그라믄예. 친오빠나 마찬가집니더.”
아… 이제사 이 오지랖 오빠가 왜 굳이 이 차를 타는지 알겠다. 둘 사이에 껴서 철저한 방해와 감시를 하겠다는 …
“네네, 자 그럼 우리도 출발할까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