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이즐넛커피 Jun 15. 2023

그래서 그냥 와봤어요

Photo by Danie Franco on Unsplash

  늦은 오후 환자 목록을 누르고 평소처럼 환자이름이 호명되는 안내 방송 목소리가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료실 문에 노크소리가 작게 들렸다. 어차피 곧 들어오실 예정인 분이지만 정확하게 두 번 '똑똑' 크지 않은 소리로 끊어서 예의를 갖추신다. 그리고 작은 체구의 할머니 한 분이 들어오셨다. 얼핏 보기에도 마르고 작은 체격이었다.  문을 들어오시자마자 바로 옆 벽으로  있는 신체진찰을 위한 간이침대에 가져오신 핸드백을 올려놓으신다.  핸드백을 놓으면서도 '이건 여기에 놓고!'라고 작게 혼잣말을 하시면서 내려놓을 때도 큰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내려놓으셨다. 그리고 몇 걸음 앞에 있는 책상 옆 의자에 앉으신다.  아직 대화하기 전이지만 문에서 들어오기 전부터 자리에 앉으실 때까지만 보아도 아주 얌전하고 예의가 몸에 배신 할머니의 모습이다.


  진료실에 앉아있다 보면 다양한 사람들이 지나가게 되고 대화를 하면서 다양한 성격의 환자분들을 대하게 된다. 대화를 시작해서 나누다 보면 오랜 시간이 아니어도 성격을 알게 되기도 하고 들어오시는 모습으로 어떤 분일까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외모로 판단할 수 없고 선입견을 가져서도 안된다. 당연히 잠시 상상해 보는 정도지 결론을 내지 않고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바로 대화를 이어나간다.


이번에 오신 할머니는 가슴에 통증이 있다고 해서 진료를 보러 오셨다. 처음 얘기를 꺼내실 때 "내가 이런 얘기를 다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라고 하시며 시작하신다. 이런 경우 본격적인 얘기가 나오기도 전부터 긴장하기도 한다. 일단 뭔가 얘기가 길어질 거 같은 느낌이 들면  진료 시간도 길어지고 본인 얘기를 많이 하길 원하는 분들은 내가 필요한 정보 말고 다른 정보들을 쏟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의 분들도 있어서 집중력을 유지하고 몸상태를 판단하는데 더 신경이 쓰이기 마련이다.  할머니의 첫마디가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지만 들어보려고 가만히 있으니 본인 상태에 대해 설명을 해주기 시작하셨다.


할머니의 스토리는 이랬다.  약 5년 전에 유방암을 진단받고 한쪽 유방을 전절제 하셨다. 이후에 가끔씩 따끔따끔한 듯하게 흉부 통증이 있었다는 것이다. 증상이 불편해서 원래 진단받고 지금도 정기적으로 추적관찰 위해 다니시는 병원에서도 진료도 보고 불편한 것을 호소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현재의 상태를 의료진에게 직접 듣거나 병원 자료를  챙겨 오신 것은 아니기에 말씀만으로 상태를 정확하게 알기는 어려움이 있다. 표현이 정확하지 않아 자세히 그간 경과를 잘 알 수 없지만 통증으로 전에 찍었던 흉부 CT 검사에서 갈비뼈 안으로 작은 혹같이 재발되었다고 알고 계셨다.  지금은 호르몬제를 복용하고 계시고 이후 다시 찍은 CT에서는 크기 변화는 없다고 알고 계셨다.  글로 적으면 몇 줄 안 되는 얘기지만 지금까지의 내용만 듣고 앉아 있자면 벌써 여러 사람 진료 볼 만큼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기 때문에 마음은 착잡해져 간다. 표현은 할 수 없지만 여기서 잠시 끊고 되물었다.


"그러면 CT도 다니던 곳에서 찍었고 진료도 계속 보고 계신데 다니던 병원에서는 통증하고 관련해서 뭐라고 하던가요?"


이 물음은 일단 환자가 아는 수준에서 병원에서 어떻게 판단하고 어떻게 앞으로 할 예정인지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함이다. 그랬더니 할머니 대답이 이랬다.


"그저 그냥 수술 때문에 그렇대요.  원래 수술하면 불편할 수 있고 계속 그럴 수밖에 없대요.  맨날 검사도 똑같고. 다른 이상은 없대요.  그러니 얘기해도 귀찮아하는 것도 같고, 언젠가는 또 갔더니 보호자랑 얘기하고 싶다 그래서 그 뒤론 아직 안 갔어요."


여기서 얻을 수 있는 나름의 정보라면 일단 최근의 검사들에서 큰 문제는 없었다는 것과  그쪽 의료진에게 증상을 말하고 진료 보는 게 마음이 편하지 않으시구나 하는 것이다.  또 보호자와 이야기를 해본다는 것은 갑자기 큰 문제가 있는 게 아닌 이상 환자랑 말이 잘 통하지 않거나 환자가 큰 문제가 없어도 병 이외에 우울감, 불안 등  정서적인 문제가 있을 때도 해당한다.  보호자에게 환자의 평소 상태나 심리, 보호자와의 관계나 케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또 환자가 스스로를 잘 돌보지 못할 때 보호자에게 간병에 대해 더욱 신경 쓰도록 하는 경우도 있는데 할머니의 경우는 어디에 해당하는지 모르겠지만 따로 보호자를 동반해서 가거나 상담은 하지 않으셨으니 이런 부분은 제한이 있었을 것이다.


  보통 암환자라고 하면 그 자체로 중증도가 높게 생각하고 병의 특성상 상태가 급변하거나 악화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동네 병원에서는 진료를 보더라도 자세히 얘기를 귀담아듣거나 관심 있게 보지 않을 것이다. 결국 무언가 문제가 있을 때는 몸 상태에 대한 평가가 우선이고 당장  찍는 엑스레이 같은 가벼운 검사로는 이전 결과가 있지 않고서는 전후비교가 되지 않을뿐더러 상태를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에 원래 다니던 병원을 가보시라고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나  역시도 어쩔 수 없이 그런 내용을 설명을 드렸다. 당장 피검사한다고 동네 병원에서 검사결과가 바로 확인되는 것도 아니고 흉부 X-ray 검사를 해놓아도 바로 판독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설명을 드려도 아쉬운 표정이 한가득이다.  


"얼마 안 있어서 또 검사하러 가는 예약이 있어요. 맨날 똑같다고 하고 다른 얘기도 별로 안 하는데  내가 그 병원에 또 가서 얘기하는 게 그 선생님도 불편하고 민폐같이 괴롭히는  느낌이 들어서 안 가고 있어요."


하신 말씀을 듣고 내가 다 안타까웠다. 몸에 큰 변화가 없어도 후유증이나 합병증으로 고생하시는 암환자분들을 전공의 수련하던 시절에 많이 봤어서 그런지 몸이 불편한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시는 환자분의 마음이 어떨지 이해가 됐다. 그래서 더 여쭤봤다.  그럼 통증이랑 불편감이 있고 계속 그렇게 불편하신데 약은 어떻게  하고 계시냐고  여쭤봤다.


"할머니 그럼 드시는 약에 진통제 같은 거 있으세요?"

"아니요. 그런 거 없어요."


돌아온 대답이 희한하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현기증과 분노가 올라왔다. 수술 후유증 때문이든 재발된 부분으로 인한 연관통이든 증상으로 인한 불편감이 충분히 있으신데 왜 여태껏 진통제조차 갖고 드시는 게 없는지 의문이었다.


"동네 병원 같은데 다른 곳에서도 진료 보고 받은 약 없으세요?"  그랬더니,

"없어요. 다른 데 가봤는데  암환자라고 하니까 그냥 큰 병원 가보라고만 하고 별로 얘기도 못했어요."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3분 진료의 의료 현실에서 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이 없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그런 마음의 여유(진료시간을 충분히 할애하면서 환자분들의 얘기를 들으려는 여유,  환자가  표현하는 나에게 와닿지 않지만 본인이 호소하는 것에 공감하고 경청할 수 있는 여유)는 오히려 사치이거나 갖고 있는 사람이 이단아 같은 현실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오늘 길게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미 충분히, 아니 과하게 시간이 지나버렸고 밖에 기다리는 분들이나 직원들의 눈치까지 보이게 되어버렸지만 이왕 시작한 거 끝맺음을 잘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들어보니 어떤 상황인지는 알겠어요."

그리고 원론적인 안내 멘트는 습관처럼 했다. 몸상태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필요하고 다니시던 병원에서 예약 날짜랑도 상관없이 기다릴 필요도 없이 가셔서 검사도 해보도록 설명했다. 몰라서 오신 것도 아니지만 중요한 것을 짚어드리는 차원에서였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항상  암환자분들은 몸 상태가 갑자기 안 좋아지기도 하고 이상 있을 때 평가가 어렵기도 해요. 그런데 의사가 불편할 수 있어도  부담 준다는 생각을 하지는 마세요. 의사가 환자분 상태를 잘 알아서 증상을 간과하거나 문제가 없을 때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향이 있을 수는 있어요. 하지만 환자분이 그렇게 계속 불편하다면 본인도 좀 더 그 불편한 증상에 대해서 어필도 해야 해요.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진짜로 계속 문제가 없어도  이제까지 진통제 하나 시도해 본 적 없는 정도로 방치 비슷하게 지나온건 저로서는 이해가 잘 되지는 않네요.  어쨌든 의료진은 환자분을 위해서 있는 거잖아요. 항상 만족스러울 수 없지만 그래도 힘든 환자 분들이 기댈 수 있는 게 결국 의료진인데 불필요하게 민폐 끼친다느니  하는 생각 하지 마세요!"

"제가 원래 병원을 잘 안 가려고 해요.  근데 오늘은 안 되겠다 싶어서 참다고 와본 거예요. 이렇게 얘기를 많이 해본 건 처음이네요. 그냥 그렇다는 거고  그래서 그냥 와본 거예요"


내가 전해드린 말도 사람들의 캐릭터에 따라서 다르게 받아들이고 가서 권리를 찾으려는  이상한  진상환자로 변형이 돼서 결과물이 생길지는 모르겠다. 이 글을 읽던 분이면 적어도 그런 것을 하라는 것은 아니라고 이해할 거라 믿는다. 오늘 오신 할머니는 진료실 문을 열기 전부터 긴 대화가 오가는 지금까지도  긴 시간 뺐는 것에 대한 죄송한 마음을 갖고 눈치를 보면서 예의를 갖추신다.  할머니 성격이 소심하시거나 예의 바른 분이고 그런 것도 있겠지만  무엇이 이렇게 이 분을 위축되고 우울한 느낌 있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병 앞에, 건강 앞에, 그리고 내 행복 앞에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받거나 걱정으로 힘드시지 않았으면 하는 게 내 생각이었다.  마지막에 그래서 그냥 와본 거라는 말씀에 나는 바로 잘하셨다고 말씀드렸다. 지금 몸이 아프고 힘든 것은  몸이나 병도 문제지만  이런 속마음을 터놓고 얘기하고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이제 어느 정도 필요한 설명도 했고 얘기도 들어드렸고  드리고 싶은 말씀도 드렸다.  여기서 검사를 한들 당장 내 주머니로 돈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정말 상태 평가가 잘 될지 확신할 수 없지만 할머니에게  여쭤봤다.


"할머니 검사결과가 오늘 다 볼 수 있는 건 아닌데 그래도 해보시겠어요?"


선택권을 드리고 하겠다고 하셔서 기본 혈액 검사 정도만 했다. 심부전 약을 드신다고 하고 종류나 이름도 모르시지만 심전도 검사는 정상이어서 당장 심장 문제는 당연히 아닌 것 같아 다행이다.  그리고 도움이 될 만한 진통제를 처방드렸다.

암성 통증이라면 일반 진통제로 효과가 제한적일 것이고 일반적인 수술 후유증이나 자세나 근육통 같은 간헐적인 통증이라면  호전되는 정도가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는데 그래도 일단 전혀 드시지 않는 것보다는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설명드렸다.  


긴 시간 동안 오래 대화를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다른 분들에게 민폐가 되긴 했지만 할머니의 불편한 마음이 나가실 땐 좀 편안해지신 거 같았다.  할머니는 진료실에서 다시 나가시면서  출입문을 완전히 지나 밖으로 나가실 때까지 연신 허리를 굽혀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시며 나가셨다. 그 모습이 뭔가 되려 죄송스럽고  진료 초반의 나의 긴장과 진료시간이 길어진 것에 대한 스트레스는 모두 잊게 했고 오히려 앞으로 통증이 좋아지셨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Photo by Lesly Juarez on Unsplash



  동네 병원 진료를 보더라도 진료실에 들어갔을 때 오랜 시간 얘기하고 만족감 있게 증상 표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짧은 시간을 보더라도 그리고 심지어 길게 잘 얘기하지 못하지만 내게 필요한 약을 처방받고 검사를 하는 것이 중요할 텐데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의사입장에서 환자분이 해주실 때 도움 될 만한 것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몇 가지 적어봅니다.


1. 증상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하자.

  감기환자가 '감기 때문에 왔어요'라고 말하는 만큼 답답한 문구가 없다. 감기로 오면 기침은 있는지 가래나 콧물은 없는지 등 지금 불편한 증상이 궁금하기 때문에  간단하게라도 당장 불편한 증상에 대한 것을 표현하는 것이 좋다.


2. 본인의 특수한 상황에 대한 정보를 주자.

  기저질환으로 조절받는 만성질환이나 수술과거력, 현재 먹고 있는 약 등은 간략하게라도 얘기해 주거나 잘 기억나지 않을 만하거나 모르겠는 것들은 메모해서 잠깐 보여주자.  일반 분들이 의학용어를 알리 없고 당연히 약이나 질환명 등 익숙하지 않은 것을 세세히 다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진단명이 어려우면 작은 메모지나 포스트잇 같은 종이에 적거나 진단명이 적혀있던 기록지 같은 것을 핸드폰 사진으로 찍어놓으면 필요할 때 활용하기 좋다.

  고혈압, 당뇨 등 만성질환을 연고지 문제 등으로 원래 병원이 아닌 다른 곳에서 약을 처방받고 조절받길 원한다면 기존 병원에서 최근 검사자료를 준비해 가면 상태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3. 본인이 먹는 약이나 갖고 있는 약 부작용을 잘 알자.

  '심부전약 먹고 있어요'라고 하면 몇 가지를 먹는지 항혈전제 같은 건 어떻게 먹고 있는지 그러한 것들이 궁금해질 수 있는데  내가 먹는 약을 모를 때는 요즘은 약국에서 약을 포장해 주는 봉투에 약 이름, 성분, 용량 등에 대한 정보가 잘 인쇄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어떤 약을 먹고 있어요 하거나 이런 약을 먹고 있다면서 작은 약 포장을 그대로 꺼내서 알약만 보여주면 파악하기도 어렵고 오래 걸리는 경우도 많으니  '제가 먹는 약이에요'하고 약이름이 인쇄된 봉투를 보여준다면 여러 말이 필요 없다.

  만성질환약을 처방받다 병원을 옮기는 경우도 기존 약  봉투등을 챙겨가서 보여주면 약 조절이 쉽다. 약의 종류는 참 다양하다. 혈압약을 똑같이 받아도 그냥 내원하면 잘 조절되던 분도 비슷한 약으로 시작하지 않고 현재 혈압만 보고 적당히 시작하는 경우에 잠시나마 혈압이 조절되지 않는 것 같은 불편한 기간이 생길 수 있다.

  과거 언제라도 특정 약을 먹고 부작용을 겪었다면 잘 파악해 놓자.  음식알레르기처럼 약에 대한 부작용이 있는 경우도 있는데 대게 소염진통제나 특정 계열의 항생제 등이 해당될 것이다. 이런 것들은 흔히 처방되는 종류 중에도 포함되는 경우가 많기에 문제가 있었던 약은 증상을  불편했을 때 꼭 의료진에게 물어서 기억하거나 적어놓고 알고 있고 진료보고 약 처방받을 때도 의료진에게 잘 얘기하는 것이 좋다.


                      - 2023.06 조용한 초여름 밤에



※ 아래는 참고입니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 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청소년 모바일 상담 '다 들어줄 개' 어플, 카카오톡 '1388', '다 들어줄 개' 채널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