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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누 Sep 12. 2021

졸업

학사모 없는 졸업이었다. 코로나로 졸업식은 비대면으로 진행됐고 학위증 수여 기간에 과 사무실에서 졸업장을 받아왔다. 사회학 전공에 유라시아 학과 부전공. "순 빨갱이로구만 이거~"라며 놀렸던 엄마 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명하다. 엇학기 복학과 긴 휴학으로 동기들보다 길게는 2년이나 늦게 받은 졸업장이었다. 

학사모와 가운을 입고 학사모를 날리며 사진을 찍진 못했지만 좋았다. 시원섭섭하기도 했고. 학위증을 받으러 가는 날엔 비가 와서 학교 건물 안에서 같이 학위증을 받은 애인과 사진을 남겼다. 



사회과학을 배우는 대학 내내 즐거웠지만 당장에 이력서에 쓸 지식은 없었다. 전공을 살려서 하고 싶은 직업이 없기도 했고. 이력서에 졸업이라 쓸 수 있는 동시에 공식적인 백수의 세계에 발을 내디뎠다. 20살이 갓 된 시절 스스로를 책임져야 한다는 '성인'의 무게보다 더 무거운 '사회 초년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컴퓨터 학원에 등록해 낯선 것들을 배웠다. 강의실 칠판과 책상이 아니었지만 쉽게 적응했다. 학원엔 나와 비슷한 또래보단 나이가 많은 사람이 더 많았고 대학교 첫 수업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흥미를 가졌던 편집 디자인을 배웠다. 포토샵, 일러스트, 인디자인. 초년생의 첫걸음은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다. 내가 배우려는 의지만 있다면 훨씬 많은 것을 배울 수도, 시간만 때우고 갈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작업물들을 보여주었다. 짧은 시간임에도 눈에 띄게 성장하는 사람들이 보였고

원래 디자인 계열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들도 있는 듯했다. 나 역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영역을 창작해 나가면서 꽤 즐겁게 배웠다. 취업과 자격증이 목적인 강의라고 생각했기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배움의 즐거움을 정말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어떤 것이든 배움의 즐거움을 누리며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들었다. 배운 과정을 토대로 본 국가자격증 시험 아직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꽤 잘 본 것 같아 그나마 위안이다. 문과의 숙명이라면 숙명이겠지만 대학 졸업장은 그냥 대학 졸업장이라고 느껴지는 졸업 1개월 차. 난 아직 아무것도 잘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래서인지 브로콜리 너마저의 '졸업'은 졸업을 하고 나서 들으면 감정이입이 배가 되는 것 같다. 


그 어떤 신비로운 가능성도
희망도 찾지 못해 방황하던 청년들은
쫓기듯 어학연수를 떠나고


꿈에서 아직 덜 깬 아이들은
내일이면 모든 게 끝날 듯
짝짓기에 몰두했지


난 어느 곳에도 없는 나의 자리를 찾으려
헤매었지만 갈 곳이 없고
우리들은 팔려가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글픈 작별의 인사들을 나누네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넌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잊지 않을게
잊지 않을게 널 잊지 않을게


낯선 풍경들이 지나치는
오후의 버스에서 깨어
방황하는 아이 같은 우리


어디쯤 가야만 하는지
벌써 지나친 건 아닌지
모두 말하지만 알 수가 없네


난 어느 곳에도 없는 나의 자리를 찾으려
헤매었지만 갈 곳이 없고
우리들은 팔려가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글픈 작별의 인사들을 나누네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넌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잊지 않을게
잊지 않을게 널 잊지 않을게


이 미친 세상에 이 미친 세상에
이 미친 세상에 이 미친 세상에
이 미친 세상에 이 미친 세상에
이 미친 세상을 믿지 않을게..

-브로콜리 너마저 두번째 정규 앨범 수록곡 <졸업>-


난 내가 이 나이쯤 되면 좀 더 어른스러워져 있을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집이 있거나 안정적인 직장이 있거나. 아니면 확고한 목표가 있어서 열심히 달리고 있거나. 그래도 뭐라도 하고 있다는 것에 위안을 두면 괜찮을까?. 간절함이 당장에 보이지 않는다면 꾸준함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늘 되뇌면서 3달 만에 노트북에 끄적인다. 공식적인 백수의 길을 축하하며. 다시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미루었던 것들을 꺼내봐야겠다.


2021.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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