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드 팬츠 입문기
필자의 학창 시절에는 소위 말해 '조금 논다'라는 남자애들은 교복 바지통을 줄여 입었다. 슬랙스와 비슷한 류의 교복 바지통을 최소 7에서부터 마른 친구들의 경우 6인치까지 줄여서 입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흡사 '아기 침팬지'가 연상되는 모습이다. 심지어 유행에 편승하기 위해 학교 정문에서는 통 큰 바지를 입고 교실에서는 줄인 바지로 환복 하는 모습은 흔했다. 복도에서는 학생부 선생님들의 눈을 피했고 수업시간에도 바지가 안 걸리도록 안간힘을 썼다. 필자는 그저 축구만 좋아했던 흔한 중학생 1이었고 심지어 허벅 지까 두꺼운 편이라 바지를 줄인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의도치 않게 지금 20대 사 에어서 많이 입는 '세미 와이드' 핏의 슬랙스를 입고 다닌 셈이다.
고등학생이 되자 의도적으로 바지를 줄여 스키니 하게 입는 친구들은 많이 줄어들었다. 여전히 멋 내기에 열중인 친구들은 줄여 입 긴 했지만 대부분 아이들은 입시 때문인지 교복을 어떻게 입는지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때쯤이었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x끼니진'이라는 짤방이 돌아다녔다. 딱 붙어서 터질 것 같은 스키니진을 입은 남자의 사진이었고, 밈(meme)화 되어 요즘 그렇게 얘기하면 어떤 느낌의 바지인지 바로 알아챌 정도다. 원래부터 스키니진은 마른 사람들의 전유물이었지만 그래서였나 대학생 때부터 거의 보기 힘들었다. 대신에 가끔씩 엄청 큰 통에 기장도 긴 바지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곤 했다. 당시 패션에 관심이 없던 필자는 저게 '홍대 스타일인가?!'라며 통 큰 바지는 입을 업두조차 내지 않았다. 신체 치수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기에 바지를 허벅지에 맞추니 허리가 남아 매번 바지는 울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오버핏 상의와 루즈한 핏의 바지는 아무나 입는 것이 아니라는 편견을 가진 체 2년 동안 민간인 신분을 내려놓고 오니 옷장에 입을 만한 옷이 업었다. 정확히 말하면 어떻게 저런 것을 입고 다녔나 싶은 것들 투성이였다. 패션에 진심을 가지고서 한 두벌 씩 옷을 모아갔지만 입문한 지 반년이 넘어가도록 와이드 한 바지는 사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그래도 발목에서 떨어지고 허벅지부터 살짝 좁아지는 테이퍼드 핏이 가장 예뻐 보였기 때문이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한창 '남자 친구 룩' 혹은 '깔끔한 룩' 등 패션에 갓 입문한 패션 새내기들에게 큰 인기를 입었던 핏이다. 지금도 적당히 캐주얼한 느낌과 깔끔한 느낌 모두 다 챙길 수 있어서 인기가 많다. 특히 주변 이성에게 물어봤을 때 '불호'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한 번도 못 봤다. 그러나 꾸준히 패션 커뮤니티도 눈팅하고 패션 관련 SNS를 하다 보니 테이퍼드 핏은 너무 무난한 느낌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커뮤니티에서 트렌디한 룩을 자주 올리는 유저들의 증언은 하나같이 비슷했다. '와이드 팬츠를 한번 입문하면 돌이킬 수 없다.' '이건 신세계다. 멋짐과 편함을 동시에 챙길 수 있는데 왜 너 안 와이드?' 등의 증언들이 쏟아졌다. 모두가 무슨 같은 종교 활동이나 같은 약을 복용한 사람들처럼 말했다. 이 악물고 '치킨 대신 바지 한벌을 사자' 주의였던 나에게 그 제안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심지어 어느 브랜드든 와이드 팬츠 사이즈 표는 왜 이렇게 자비로운지 흡사 고등학교 때 자주 시켜먹던 동네 시장 치킨집 사장님의 인심 같았다. 밑위, 허벅지 단면 모두 내가 입던 바지들보다 최소 2cm 정도는 여유가 있었다.
가장 취향인 와이드 데님을 고르고 택배 상자를 열었다.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바지의 통에 발끝을 집어넣었다. 지퍼까지 올린 후의 나의 마음은 옆의 짤방과 같아졌다. 왜 모두가 한 번 입으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고 했는지 알겠다. 게다가 필자 체형은 팔이 엄청 길고 하체가 짧은 체형인데 기장감이나 핏이나 다리도 길어 보이는 효과를 주어 스타일적으로도 더 다양한 조합이 가능해졌다.
그 이후로 최소 주 2일은 와이드 팬츠를 입을 수밖에 없는 몸이 됐다. 가끔 와이드 팬츠가 불호라는 사람들 말도 있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대들의 불호를 받더라도 와이드 팬츠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그대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아쉽게도 직업 특성상 와이드 팬츠를 입을 수 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주말에라도 꼭 한 번은 입어보기를 추천한다. 옷장에 레귤러, 슬림핏 팬츠만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벌쯤은 가지고 있다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주말 나들이 갈 때도 캐주얼하면서도 한국인이 아주 좋아하는 '꾸안꾸'룩에 제격인 데다가 발등을 살짝 덮는 기장감은 대부분의 신발에도 잘 어울린다. 혹여 패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괜찮다.
주 7일 중에 하루쯤은 다리가 바람을 쐬게 해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