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회 초년생의 독백

-옷 하나에 한 글귀

by 하누

그래도 처음 살 땐 광도 살짝 돌고 빳빳해 보였던 것인데.. 지금은 언제 광이라도 났었냐고 묻는 듯 째려보는 것 같다. 여기저기 긁힌 자국은 내 몸 여기저기가 쑤시는 거랑 같은 것이겠지.


"너도 힘들구나"


출근길과 퇴근길의 풍경이 크게 다르지 않은 이유는 뜨는 해보다 내가 부지런하고 지는 해보다 늑장을 부려서였나 봐. 나만 바쁠 것 같았던 세상은 모두가 나보다 더 바쁘더라. 출근길 지하철은 늘 붐볐고 어둑어둑한 퇴근길에도 역시 자리는 여유롭지 않았거든. 근데 일주일 내내 그랬다? 막차시간에 아슬아슬하게 환승을 해야 할 때면 광운대와 청량리가 종점인 지하철은 왜 이리 많은 것인지.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 막차를 타면 이런 생각을 하지. 오늘은 최대한 빨리 잔다 해도 6시간을 꽉 채워서 잘 수는 없겠구나.


"근데 원래 이렇게 힘든 건가? 그래서 동기들과 선배들이 대기업을 가라고 노래를 불렀나..?"



음.. 그러기엔 대기업의 이름을 단 빌딩들은 주말에도 환하게 켜져 있던 적이 많았는데. 거기도 더하면 더했겠지. 한국사람들의 대략 90퍼센트가 중소기업에서 일한다고 하니까 모두가 견뎌내고 있는 것일 거야. 대표 놈 면접 볼 때는 야근이 없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는데 역시 대표 정도 되려면 거짓말은 티 안 나게 할 줄 알아야 하나 봐. 도저히 한 명이서는 야근을 할 수밖에 없는 업무량과 아이돌 티켓팅 급 마감 기한을 주면서 야근하고 있으면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볼 때가 있다니까. 다크서클 턱까지 내려가서 야근하는 팀원들 앞에서 "되도록 야근은 안 하는 게 좋지 않겠냐."라고 웃으며 말하는데 이래서 옷 안에 사직서를 품고 다닌다는 말이 있는 거였나봐.



그저 그런 스펙으로 괜찮아 보이는 곳에 취업해서 좋아했을 때가 몇 개월 전인데 역시 인생은 계획대로 안 되는 게 맞나봐. 기대했던 일을 하며 경력을 쌓는다는 느낌은 하나도 없으니까. 대표의 입맛에 따라 이리 바뀌고 저리 바뀌는 근본 없는 시스템이며 왜 그 놈은 항상 마감 직전에 1부터 10까지 피드백을 하는 걸까? 내가 검토해달라고 한 게 언젠데? 저번 프로젝트도 대표 손을 거치니 아름다운 똥이 되어서 그 주에 모든 팀원이 야근으로 친해질 수 있었지.



그래,잘 될 거라는 기대는 안했으니까 그렇다 치자. 중요한 프로젝트 쌓여있을 때 꼭 업무랑 관련 없는 자기 일 단순작업으로 확인하라고는 왜 하는 거야? 인내심 테스트하는 건가? 대표가 만든 신입 MBTI 검사에 이런 문항이 있는 건가? '짜증에 짜증을 더해보고 반응을 살펴보세요' 같은. 추측해보건대 대표 의자에 앉으면 환각성이 강한 마약성 각성제가 등에 꽂히는 게 아닐까? 고된 노동에 영혼이 반쯤 나가 있는 팀원들의 얼굴이 일과 사랑에 빠진 워커홀릭으로 보이는 거지. 월급이라도 많이 주면 몰라. 존엄성과 월급 그 사이 어딘가야 내 월급은.



퇴사 생각으로 아침을 맞이하고 퇴사 생각으로 퇴근길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지만 말처럼 쉽지 않으니까 다들 어떻게든 다니는 거라고 믿어. 안 그러면 나만 너무 사회 부적응자처럼 보일 거 아니야. 퇴근 후에 맥주 한 캔과 넷플릭스는 무슨, 누구야 회사원의 로망 아닌 로망을 자극한게. 씻고 누우면 12시가 넘는걸? 더 슬픈 건 이렇게 앞으로 몇 개월은 더 있어야 되겠지? 요즘은 경력직 뽑으려면 최소 1년이던데. 그러고 보니까 20대 탈모의 원인이 스트레스라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회사에서 고통받는 거지? 근데 나도 못 피할 거 같아서 또 울적해진다야.




학교 다닐 때는 엄청 추상적이게 혁명이니 사회 변화니에 대해 이것 저것 배웠는데 말이야 이제 보니 주 4일만 일하고 집 가서 저녁 먹는 삶이 21세기의 혁명일지도 몰라. 뭐? 내가 너무 게으르다고? 에이 주 5일제 한다고 했을 때 생각해봐 기업이 망하고 가정이 무너지고 나라가 망하고.. 별소리를 다했는데 지금 아무것도 망한 거 없다고. 모든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는 없어. 그렇다면 하기 싫은 일 하고 나면 하고 싶은 것들은 할 수 있게 해 달란 말이야. 그럴듯 하지?




고등학교에 가고 대학교에 가고 사회로 나갈 때 가지려는 것보다 버려야 했던 것들이 많았는데. 바라는 건 많이 없었는데 이제 보니 욕심이 많았어야 하나보다. 아닌가? 20대 막바지의 내가 단단한 어른이 될 줄 알았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아직 애 인가봐. 그래서 신발장 앞에서 궁상떨고 있겠지. 그래도 네가 많이 정들어서 여기 쭈그려 앉아서 넋두리하는 건 좋다. 다 좋아. 다 좋은데 왜 내일이 월요일인 거지? 일요일 전날에 누우면서 그런 생각을 하곤 해. 사실 이건 K-트루먼 쇼였던 거야. 나는 지금 사회 초년생의 고달픔을 보여줘야 하는 장면인 거라고. 이제 이 단계를 벗어나면 덜 고달파지고.. 연금복권도 당첨되고..




너무 많이 마셨나 보다. 엄청 주절 주절댔구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지금 누우면 6시간 좀 덜 되게 잘 수 있겠다. 들어줘서 고맙다. 조금만 참아. 다음엔 네가 출근용 신발이 아닌 곳으로 가볼 테니. 잘 자고 내일도 잘 부탁해.







2021. 05. 26

짧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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