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가 문제가 아니야
한국을 떠나온 지도 벌써 8년 차, 나름 이곳저곳 다양한 나라에서 살아봤기에 문화 차이는 내게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선은 너무 어려서 뭘 모를 때 한국을 떠났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당시만 해도 한국의 지나친 비교문화와 경쟁문화에 진저리가 나서 나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거의 도외시하듯이 살려고 부단히 도 노력했었기 때문이다. 호주에서도 한국인 친구는커녕 한인 사회에 발을 들여놓으려 하지도 않아서, 시드니에서 거주할 방을 구하며 보러 다닐 때도 한국인이 한 명이라도 살고 있으면 그 집은 옵션에서 배제시켰다. 그러다가 한국인이 제일 없다고 판단되었던 시드니 뉴타운에 정착해서 유럽인 친구들과 살며 어울려 지내기 시작했고 지금 생각해보니 유럽에 정착하게 된 것도 다 그때의 영향을 알게 모르게 받은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나는 문화 차이? 별로 크게 못 느끼며 살았다고 생각한다, 아니, 했었다. 워낙에도 털털하고 화끈(?)하다는 얘길 많이 들을 만큼 외향적이고, 사람들 만나는 것 좋아하고, 처음엔 영어를 잘 못했어도 막무가내로 나가는 정신을 그때부터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무리에도 잘 어울려 지냈었다. 호주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에서 살 때도 이탈리아인 친구들을 여럿 사귀며 나는 영어를 가르쳐주고, 반대로 그 친구들은 내게 이탈리아어를 가르쳐주면서 오손도손 잘 지냈었다. 지금 글을 쓰며 돌이켜보니 어쩌면 적응하는 데에 바빠서 문화차이고 인종차별이고 뭐고 잘 못 느끼며 살았나, 싶기도 하다.
그 문화 차이를 나는 요새 이곳 네덜란드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한국의 비교 경쟁문화를 너무 싫어한다. 학교생활이던 사회생활이던, 특히 직장생활에서는 무조건 남들보다 더 잘, 더 빨리, 더 더 더 더! 끝이 없는 보이지 않는 경쟁에 학창 시절에 벌써 번아웃과 우울증을 앓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내 유전자 속에 깊숙이 박혀있으리라고는 정말 몰랐다.
대학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내가 그다지 경쟁심이 있다고 느끼지 않았다. 유럽에서, 그것도 여유롭고 chill 하기로 유명한 네덜란드에서 공부를 하니 당연히 다른 애들에 비해선 내가 좀 빨리 성과를 내고, 과제를 제출하고, 공부를 좀 더 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같은 학년 친구들에게 듣기로는 나랑 같은 그룹이 되면 그 조별과제는 이미 성공한 거나 다름없다는 소문이 나도 모르게 돌고 있었다고 한다. 처음 이 얘길 들었을 땐 사실 좀 뿌듯했다. 짜식들, 이게 바로 한국인의 힘이다. 뭐든지 빨리빨리. 효과적으로. 알지?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하니, 이 빨리빨리 정신은 네덜란드 정서에 정말 안 맞는다.
이걸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 바로 네덜란드 직장생활에서 알게 됐다. 내가 속한 학사학위 프로그램의 한 부분으로 4년 중 1년은 인턴쉽을 하는 것이 원칙이며 나는 이 인턴쉽을 지난 9월부터 시작하여 네덜란드 기점의 다국적 기업에 취직하게 되었다. 인턴이긴 해도 나름 정해진 업무도 있고 단독 프로젝트도 진행하게 되어서 높은 퀄리티의 인턴쉽을 한다고 자부해왔는데, 나의 한국인으로서의 빨리빨리 유전자가 큰 장애물이 되었다.
"업무량도 좋지만, 우리는 그 업무의 질이 더 중요해."
첫 업무평가에서의 피드백이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이 멍해졌다. 나는 이곳까지 와서는 한국에서 고등학교 시절 입시 공부하듯이 무조건 더 많은 문제를 풀어내는 것으로 나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나를 관리하는 상사는 저것 말고도 내가 얼마나 문제 처리능력이 빠른지에 대해도 칭찬해줬지만, 나는 저 말을 절대 잊지 못할 거다. 천천히 가도 되니까, quantity 보다는 디테일과 quality에 집중하라는. 배울게 산더미다. 아, 나는 뼛속까지 한국인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