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백선생이 없었더라면~ 무슨 맛으로 밥을 먹을까~
우리 가족들은 모두 요리를 잘한다. 엄마는 한식, 양식 조리사 자격증이 있으시고 언니도 '나, 이거 먹고 싶어'라고 말만 해도 그 요리를 뚝딱뚝딱 잘 해낸다. 심지어 아빠까지도 된장찌개, 김치찌개 등 찌개류를 정말 맛깔나게 하신다. 비법을 물으면 이게 다~ 사랑으로부터 우러나는 거라며 웃는 우리 아빠의 봄철 냉이와 두부를 팍팍 넣은 냉이된장찌개는 정말 일품이다.
나는 집밥을 먹고 자랐다. 외식을 굳이 해도 집에서 먹는 밥만큼 맛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뿐더러, 요식업을 평생 업으로 삼으시던 외할머니의 김치가 아니면 밖에서 먹는 김치는 입에 대질 않는 깐깐한 입맛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허나 이런 깐깐함은 외국생활을 하며 어쩔 수 없이 서서히 무뎌지게 된다.
그래도 호주에 살 때는 그나마 조금 나았다. 시드니의 한인타운이라 불리는 스트라스필드나 시티센터만 가도 한국인들이 요리하고 한국인들이 서빙하는 100% 한식당을 쉽게 갈 수 있었고 가격도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당시만 해도 나는 외국 뽕에 차올라서 한식을 그리워하지 않았다. 게다가 도처에 태국, 베트남, 인도, 그리스 등등 먹을게 널리고 널렸었기 때문이다.
한식에 대한 그리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이탈리아에서 살면서부터이다. 물론 첫 한두 달은 행복했다. 동네 피자가게 (Pizzeria)에서 전통 이탈리아 스타일의 피자를 매일 먹을 수 있었고 치즈며 햄이며, 와인과 함께 단돈 몇 유로로 즐기는 호화스러운 삶을 즐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 단조로운 토마토, 크림, 오일, 치즈가 베이스로 된 음식들이 물렸다. 물려도 너무 물렸다. 깡촌에 살았기 때문에 한식당은커녕 그 흔하디 흔한 중식당도 없었으며 일식당이라고 흉내만 낸 곳은 냉동연어를 써서 초밥 모양만 낸 것을 아주 비싼 가격에 파는 곳뿐이었다. 안 되겠다 싶어 차를 타고 1시간 이상을 달려서 도착한 아시안 식료품점에서 찾은 쓸만한 재료들은 간장과 참기름밖에 없었다. 그래서 온라인으로 주문할 수 있는 웹샵을 찾아서 주문하려고 하니 웬만한 식품들은 냉장/냉동식품이라 내가 사는 곳 까지는 배달을 안 해준단다. 눈물을 머금고 라면이나 소스류같은 종류만 주문해서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 고추장, 간장, 설탕, 물엿, 마늘만 있으면 웬만한 건 다 해내는 장금이가 되는 연습을 시작했다. 한국에 살 때는 요리할 일도, 이유도 없었다면 이제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해야 했다.
그것에 더해져, 네덜란드에 이사를 오던 비슷한 시기에 위대하신 백종원 님께서 유튜브 채널 운영을 시작하셨다. 할렐루야. 깜깜한 내 유학생활에 한 줄기 빛 같았다. 백선생의 유튜브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분의 특징 중 하나는 외국에서 구할 수 없는 재료들을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점이다. (외국에 사는 팀원님들, 화이팅!)
한국에 사는 입장에선 집 앞 슈퍼에서 간단히 구할 수 있는 것들이라 이게 왜 중요한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이게 외국살이에 은근히 많은 위로가 된다. 최근에는 잔치국수를 따라서 만들어 봤는데, 반응이 의외로 폭발적이었다!
이제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한식 마스터"라고 불린다. 물론 유럽인들 입맛에 안 맞는 것도 있을 테고 한국음식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이들에게 평가를 받을 수도 없는 건 알지만, 난 내가 자랑스럽다. 먹고 싶던 칼국수도, 닭볶음탕도, 잡채도, 떡갈비도 금방 만들어내는 내가 기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백종원이나 인터넷의 도움으로도 만들어낼 수 없는 음식이 있다는 사실에 종종 슬퍼지곤 한다. 예를 들면 우리 아빠의 냉이된장찌개나, 할머니의 꽃게탕 같은. 그래도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이 헛헛함이 조금은 채워지지 않을까,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