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것,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이곳에서 내 직무의 이름은 Junior Account Manager, 단어 Account는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계정이지만, 우리 회사에서는 각각의 거래처들 Accounts라고 통상적으로 지칭한다.
예를 들어서 Western European Account Manager이라고 하면 서유럽 지역에 있는 고객사들과의 소통을 총괄적으로 조정하고 담당하는 매니저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주니어, 그러니까 사실 한국으로 치면 그냥 평사원이다. 인턴인데도 이렇게 근사한 직함을 달아줘서 감사할 따름이다. 거래처들에게 메일을 보낼 때 서명란에 인턴이 아니라 주니어 매니저 어카운트라니, 그래도 조금 체면이 산다고 해야 할까.
졸업도 하기 전에 이렇게 회사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은 큰 행운이다. 네덜란드에서 내가 공부하는 International Busienss 과정을 졸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총 1년의 실무를 해야 하는데, 내가 이 프로그램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전의 글 (낮은 땅, 높은 꿈 3편)에서 설명했던 실무 중심대학과 연구중심대학의 차이점을 다시 한번 짚어보자면, 내가 다니는 곳은 실무중심대학으로 말 그대로 실무를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총 4년의 프로그램 중 1년은 현장에 뛰어들어 직접 일을 해보고, 일하게 된 분야 (나의 경우엔 세일즈와 마케팅)이 본인의 적성과 적합한지를 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심지어 이게 의무이기 때문에 이 1년의 인턴십을 하지 않는다면 졸업을 할 수 없다. 반면에 내가 알기로는 연구중심대학은 이 부분이 의무는 아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프로그램이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되고 효과적이라고 느끼는데, 수업을 들으며 이론적인 공부를 할 때와 정말 실제로 직접 일을 해보면 차이점이 상당히 큰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랄까.
아무튼, 나는 내가 무슨 분야로 커리어를 확장하고 싶은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냥 닥치는 대로 지원을 했었다. 엄청난 학비 덕분에 졸업 유예는 애초부터 선택지에 있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운이 좋게도 내가 사는 도시 근교에 위치한 또 다른 소도시에 위치한 국제기업에서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우연이다 운이다 싶어도 사실이기엔 너무 조건이 좋아서 긴가민가했다. Too good to be true..
첫 번째로는, 그렇게 작은 도시에 그렇게 큰 사이즈의 기업이 있다고?
두 번째로는, 하필 한국어를 쓰는 사람을 찾는다고?
알쏭달쏭한 마음으로 인터뷰를 하기 위해 찾아간 회사와 사무실을 직접 눈으로 보고 나서야 아, 유령회사는 아니구나 안심이 들었었다. 그리고는 평소엔 한국인인 게 단점으로 작용할 때가 많은데, 이렇게 가뭄에 콩 나듯 한국인인 것이 강점이 된 경우가 종종 있기도 하는구나,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네, 싶었다. 그렇게 얼떨결에 입사하게 된 현재의 회사에서 맡게 된 직무가 바로 영업부에서 고객사를 담당하는 것이다.
말단 영업사원으로서의 내 책임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1. 리서치. 그러니까 인터넷을 뒤져서 새로운 시장 크기와 시장 진입에 대한 가능성을 알아내기
: 다행이게도 인터넷 강국 대한민국 출신인 나는 검색하는걸 참 잘 해낸다. 그러니까 무작정 구글링 하는 게 아니라 믿을만한 자료인지, 그 자료들에서 무엇을 알아낼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는데 지난 3년 동안 쓴 무수한 리포트들로 인해 단련이 되어서 그다지 어려운 건 아니었다. 검색만 해서 끝나는게 아니라 그로부터 이론적인 결론을 도출해내는 것이 나의 능력을 보여주는 데에 가장 중요하다.
2. 유럽의 고객사를 담당하고 있는 상사의 잡무 돕기 (프레젠테이션이나 보고서 만들기, 데이터 분석하기 등)
: 능력 있는 세일즈맨이자 영업팀의 팀장인 나의 상사는 정말 바쁘다. 아이도 네 명이 나있는 한 집의 가장이다. 핸드폰 두대, 차도 두대, 심지어 보트도 두대. 모든 일상들을 저글링 하는 그를 다양하게 돕는 것이 나의 또다른 일. 한 번은 본사에서 보고서를 3일 내에 써내라는 지시가 내려와서 나와 그, 단 둘이서 엄청난 데이터를 분석해서 보고서를 써낸 적이 있었다. 내가 없었을 땐 어떻게 해 냈지, 싶었던 경우다.
3. 한국에 있는 잠재 고객사들에게 전화/이메일 돌리기
: 정말 의외의 복병이었다. 한국어를 너무 오랫동안 쓰지 않아서 말이 안 나왔다. 이메일을 써보려고 해도 실무에 적합한 비즈니스 용어가 자연스럽게 한국어로 뭐라고 써야 하는지 헤매기만 하고, 영어에서 한국어로 번역을 해봐도 어색하게만 보였다. 한국에선 한번도 이런 사무직을 해 보지 못한 것이 이유였다. 한국 포털 사이트를 열심히 뒤져가며 겨우 자연스러워 보이는 문장을 써서 메일을 보내 놨더니, 이젠 직접 전화를 해보란다.
자랑스럽지 않지만, 나는 전화 공포증이 있다. 아는 사람은 알 거다. 전화하는 걸 싫어하고 기피하는 것을 넘어서 전화를 하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에 땀이 나는 나는 이 전화 공포증 중증을 경험했다. 특이한 점은 일상생활에서의 전화 (가족, 친구에게 하는 전화)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데 이렇게 직장에서 그것도 잠재 고객사에게 전화를 하는 게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이해하기 힘든 이 증상에 대해 열심히 검색을 해보니 (나는 어쩌면 리서처가 될 운명일지도 모른다...) 이런 증상이 사실은 꽤나 흔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특히 나같이 영업전화를 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그 자체가 Sales Call anxiety (SAC, 영업 전화 불안증)이라는, 이름까지 있는 증상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이렇게 증상의 이름을 알고 나니 좀 안심이 되었다. 그렇지만 다른 사회생활들은 잘 해내는 내가 전화만 무서워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아서 더 알아봤다. 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 SAC는 바로 거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생기는 건데, 일상의 전화 걸기와는 다르게 이렇게 영업전화를 걸게 되면 면전에 대고 차가운 반응을 얻거나 '거절'같은 부정적인 반응을 받기 십상이다. 이 '부정적인 반응'이 두려워서 불안증이 생긴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나는 미움받을 용기가 없어서 전화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는 말이다.
와우, 뒤통수가 얼얼했다.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흥했을 때 콧방귀를 뀌던 과거의 나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나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왔다고 여겼는데 이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툭 튀어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갈등을 피하는 회피성 성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점이 직장에서까지 드러날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