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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ro Nov 25. 2021

네덜란드에서 영업사원으로 살아남기 (2)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내게 남은 선택지는 단 두 가지였다. 얼얼한 뒤통수를 붙잡고 그냥 계속 회피하는 삶을 선택하거나, 누가 감히 내 뒤통수를 때렸어? 라는 마음으로 용기를 가지고 맞서 보거나. 말이 좋아 평화주의자이지 결국엔 회피성 성격장애를 가진 내게는 상당히 어려운 선택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영업직? 안 하고 말지. 영업 전화 안 해도 되는 회계분야로 가면 돼.라고 열심히 행복 회로를 돌렸을 텐데 이번에는 달랐다. 이걸 극복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전화하기 전 내 모습 같다... 출처 | Sales Buzz)

SCA (Sales Call Anxiety)라는 용어가 소개된 학술지 (Rousseau, G. G., & Jansingh, L. (2002). Sales call anxiety: Investigating the role of fear in a selling situation) 에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몇 가지 소개하고 있는데, 나는 그 중 아래의 방법들을 실행했다.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 돌리기. 즉, 이미지 트레이닝을 반복적으로 하기.

전화하기 전 심호흡을 5회 하기. 나는 5초 들이쉬고 5초 내쉬는 555 방법을 사용했다.

준비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철저하게 준비하기. 상대방에서 질문을 했을 때 허둥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특히 이 불안증은 전화를 끊고 나서도 내가 말실수를 했으면 어쩌지, 라는 마음이 들기 때문에 철저한 준비를 해서 적절하게 답변을 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 예방을 할 수 있다.)

비슷한 맥락으로, 필요한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나만의 방법으로 정리해두기. 나는 간략히 표를 만들어 화면에 띄워뒀다. 

수화기 너머의 상대편도 나랑 마찬가지인 사람이며 사원일터이다, 라는 마음을 갖는다.

집에서 대본을 써서 읽어보고 녹음해본 뒤 들어보기. 개인적으로 이게 가장 많이 도움이 됐다. 출근 전 샤워를 하면서도 중얼중얼해보면서 좀 입에 익게 하는 연습을 했다.


수화기를 집어 들고 번호도 입력했다. 심호흡도 하고. 스스로에게 괜찮아, 거절하면 어때? 잃을 것도 없잖아. 주문 아닌 주문을 되뇌며 친숙한 한국의 따르릉- 통화연결음을 기다렸다. 철컥-하고 곧이어 여보세요? 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빨리 받을 줄은 몰랐는데. 어쩌지. 


"어.. 안녕하세요! 저는 네덜란드의 XX의 영업부 OOO입니다"


대답이 없다. 오 마이 갓 어떡해. 벌써 입술이 바짝 마르고 손엔 땀이 차기 시작했다.


"... 네, 그런데요? 무슨 일 때문이시죠?" 길게만 느껴지던 짧은 침묵 끝에 돌아온 질문에 오히려 더 당황했다. 이 부분은 샤워하며 연습한 대본에 포함되어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패닉.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정확히 안 날 정도로 통화를 하곤 급하게 끊어버렸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뒤 까맣게 뜬 핸드폰 액정을 보며 생전 한 번도 말을 더듬어본 적 없던 내가 고작 통화 하나로 허둥대는 모습에 자괴감을 느꼈다.


그것도 잠시, 오기가 생겼다. 이게 뭐라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내 자신이 너무 무력하고 한심하게까지 느껴졌기 때문이다. 미움받을 용기가 없어서 이런 두려움이 생겼다는 자체도 뭔가 자존심이 상했다. 해외살이를 시작하며 남들이 뭐라하든, 미워하고 거절해도 난 내 중심을 잡고 살아가리라 수없이도 다짐했었다. 고작 통화 하나 때문에 그런 다짐들이 무너지게 둘 순 없었다. 이런 마음가짐이 생기자마자 곧장 다시 전화기를 들고 다음 타자를 선택했다. 이번에는 접근 방식을 달리했다. 


"여보세요? 저는 네덜란드 XX의 영업부 OOO입니다. 저희 XX는 ㅁㅁ를 유통하는 네덜란드 기반 다국적업체입니다. 다른 게 아니라 OO사의 구매전략팀 담당자분과 통화가 가능할까요? 공급처 확대에 대해 논의를 드리고 싶어서요."

"아 네 안녕하세요, 제가 바로 연결해드리겠습니다"


이 방법으로 시도하는 게 먹히는구나, 싶었다. 우선 담당자분과 성공적으로 전화 연결을 한 후에는 조금 수월했다. 가장 처음이 어려웠지 복기한 부분과 화면에 띄워둔 자료 덕분에 들어오는 질문들에 막힘없이 술술 대답했다. 긍정적으로 검토한 뒤 연락을 주겠다는 답변을 받아내고 통화를 종료했다. 


고작 두 번째 시도였는데, 처음보다 몇백 배는 낫다는 기분이 들었다. 알 수 없는 흥분감과 아드레날린이 차오르면서 재빠르게 세 번째 전화를 시도했다.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나는 첫날에 연이어 10군데를 전화하는, 전형적인 영업사원이 되어가는 첫걸음을 뗐다.


물론 긍정적인 반응만 받은 건 아니다. 내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부정적인 리액션도 받았다. 관심 없다는 차갑고 냉랭한 거절에 나는 침착하게 "그래도 바쁜 시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이 아니더라도 혹시 가까운 미래에 기회가 생긴다면 꼭 한번 더 저희의 제안을 고려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라는 스무스한 멘트를 날리며 통화를 종료했다. 엑셀 시트의 코멘트란에는 '내년 상반기 한번 더 전화해보기'라는 노트도 달았다. 이제 나는 더이상 통화도, 거절도 두렵지 않다.


인맥형성 및 구직에 특화된 소셜미디어 서비스인 LinkeIn에서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영업부 뿐 아니라 전반적인 인사 결정 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특성 중 하나가 바로 거절을 어떻게 다루는지 (Handling refusals)라고 한다. 아무리 냉랭한 반응을 받아도 그걸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고 상처를 받는 다면 살아남기 힘든 건 당연하고, 그것뿐만이 아니라 어떠한 리액션에서도 피드백을 창출해낼 수 있다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거다.


아, 정말 난 갈길이 멀었다. 그래도 한걸음 한걸음 나아지는 내가 대견하다.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기분이 물씬 든다. 마무리하며, 시인 오마르 워싱턴의 시 '나는 배웠다'를 인용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또 배웠다. 인생은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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