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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ro Oct 11. 2021

네덜란드는 느리게 흐른다

운하의 나라, 이곳에서

벌써 네덜란드에 오게 된 지도 4년 차다.

처음엔 얼레벌레 나도 모르게 후다닥 준비해서 와서는, 정도 못 붙이고 공부만 마치면 떠나리라 싶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네덜란드는 날씨가 정말 별로다.

호주, 이탈리아, 캄보디아 살 적엔 날씨 고마운 줄 몰랐는데. 이곳에선 햇볕의 감사함을 배웠다.


우중충하고 흐린 날씨 하면 유명한 영국처럼, 네덜란드도 비가 많이 오고 하루에도 열두 번 날씨가 변한다.

아침에는 비가 오고 흐렸다가, 점심 즈음엔 화창해지더니 오후엔 거센 바람과 다시 비가 오거나

시도 때도 없이 오는 비는 물론이고 여기서 이렇게 큰 우박은 처음 봤다. 이러다가 내 차 창문이 부서져버리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으니까.

내가 사는 지역인 Groningen에 내렸던 우박 실제 크기 (출처: World Today News)

이런 심술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곳에 정을 붙이게 된 건

모든 게 느리게 흘러가는 여유 넘치는 그들의 라이프스타일 탓이다.


물론 성질 급한 한국인으로서 속이 뒤집어질 때도 허다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은행에 가서 계좌를 개설하려는데, 한국 같으면 바로 카드 받고 비밀번호 설정한 뒤에 입금까지 뚝딱 한 번에 해결할 것을 여기에서는 집으로 우편을 보내줄 테니 기다리란다. 

얼마나 걸리냐니 일주일은 걸릴 텐데 그것도 주말 제외하고 생각해야 하니 열흘은 기다려야 한단다.

그럼 그 열흘 동안 나는 은행계좌도 없이 혈혈단신 한국에서 가져온 환전 유로로 생활하라고?


그래, 한국이 워낙 빠르긴 하지, 참을 인자 새기며 기다렸더니, 우편이 오긴 왔는데 은행 카드만 덜렁 들어있다.  은행카드와 함께 동봉된 임의로 은행에서 설정해준 카드 비밀번호... 이게 어째서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받았다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안 그래도 있는 비밀번호들도  다 기억 못 해서 큰일인데, 어쩌지.

어찌어찌 그래, 그렇구나 인정하자, 싶다가도 인터넷 뱅킹 사용하려고 하니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데, 내 기억엔 그런 거 설정한 적이 없다.

검색해보니 또 다른 우편으로 보내준단다. 

하루 지나고 나니 우편이 왔다. 

내가 설정한 것도 아니고 임의로 설정된, 심지어 바꿀 수도 없는! 괴상망측한 아이디와 함께.. 

그래도 다행인 건 비밀번호는 바꿀 수 있었다. 


아무튼 이런 소소한 것들 하나하나가 나의 속을 갉아먹었다, 성질 급하기로 소문난 내가, 유럽의 라이프스타일에 기대를 너무 많이 했던 거다. 


그래도 네덜란드가 다른 유럽 국가들 (예를 들어 이탈리아, 스페인, 심지어 독일)에 비해서 딱 하나 잘 발달되어있는 것은, 웬만한 것은 디지털로 해결이 된다는 거다. DigID (디지디,라고 읽는다)라는 전자본인인증 서비스만 개설하면, 세금이라던가 보험이라던가 모든 게 다 연동되어있어서 집에서도 그냥 인터넷으로 해결 가능하다.

문제는 이 디지디를 받는 데까지도 한참이나 걸린다는 거지만...


아무튼, 각설하고, 내가 네덜란드에 정을 붙이게 된 것도 다 이런 느리게 흘러감의 미학이다.

이곳 사람들은 워라밸에 거의 목숨을 건다. 살기 위해 일하는 거지, 일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란 거다.

보통 아침 8시에 출근해 4시에 퇴근하는 게 일반적이고, 저녁은 웬만하면 집에서 가족과 함께 먹는다.

가족이 없는 싱글이어도, 친구들과 함께 보내거나 혼자만의 자기 계발, 운동, 취미활동을 하는 시간에 더 의미를 둔다. 


그러니까, 이런 관공서나 은행에서 업무를 해결하는 게 오래 걸리는 건, 당연한 이야기라는 거다.

한국에서의 빨리빨리 서비스에 익숙해졌던 나는, 그 빨리빨리의 숨겨진 곳에서는 자신의 시간을 포기하고 그 마감기한에 맞춰서 가족과의 추억을 희생하는, 이면이 있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나는, 느리게 흘러가더라도, 소중함과 가치를 중요시 여기는 이곳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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