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도 취향도 꿈도 없어요
2022년이 밝아오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도 당찬 포부로 새해를 맞이하려는 게 계획이었다. 광란의 새해 전야를 과음으로 보낸 탓에 자기반성에 휩싸인 1월 1일을 보낸 뒤, 이건 아니다 싶어 1월 2일부턴 일요일이었음에도 일찌감치 일어나 모든 창문을 열어젖히고 집안 대청소로 하루를 시작했다. 동거인도 덩달아서 홈트레이닝을 하고 집안의 모든 창문까지 뽀득뽀득 닦기도 했다. 말로 하진 않았어도 둘 다 무언가가 다른 마음가짐이 있는 것은 확실했다. 작년보다 조금 더 나아지고 싶은 마음.
작년 봉쇄령이 처음 내려진 후 뭐라도 해보자 싶어서 그림을 그려볼 요량으로 구매했던 A3 사이즈 스케치북을 식탁 위에 펼쳤다. 한가운데에 '2022'를 크게 쓴 뒤 브레인스톰 형식으로 네 가지의 카테고리를 구성했다.
1. Health (건강) | 2. Finance (재정) | 3. Surrounding (주변 환경) | 4. Self-growth (자기 성장)
1,2,3번은 그냥저냥 나름대로 차곡차곡 이루고 싶었던 것이나 작년에 이루려 했지만 차마 이루지 못했으니 이번 연도엔 꼭 해보자 싶은 것들- 예를 들면 출근 전 아침에 일찍 일어나 30분씩 요가를 한다던가, 저축 얼마 얼마를 달성해서 발리 여행을 다시 갈 거라던가 하는 엄청난 포부 - 이 채워졌는데 4번에서 턱 막혔다. 지금껏 1,2,3번이 곧 자기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어라, 뭔가 잘못됐나 싶어서 턱을 괴고 찬찬히 살펴봤다. 아니었다. 건강, 재정, 주변 환경은 나의 자기 성장과는 딱히 관련이 없었다. 그래서 머리를 벅벅 긁기도 해 보고 따뜻한 차를 한잔 마시며 고뇌도 해보았지만 4번은 여전히 공백으로 남았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아, 나는 이루고 싶은 것도 없는, 열정도 없는 어른이 되고야 말았다.
우리가 영어를 배울 때 가장 처음 배우는 것 중 하나가 자기소개이다. Let me introduce you myself~ 로 시작하는 주입식으로 배운 영어 문장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이름, 나이, 학교를 말하면 이제 드디어 나의 취미를 이야기할 때가 온다. Hobby. 취미. 해외 생활을 하면서도 비슷한 종종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의 대답은 영화 감상이라던가 음악 듣기, 책 읽기 같은 흔하디 흔한 것들이었다. 그러다가 한번 지인이 그건 취미가 아니라 그냥 흥미, 혹은 자유시간 보내기가 아니냐는 반문을 했다. 즉, 나의 답변은 "What do you do in your free time? (자유 시간에 뭘 하며 시간을 보내니?)"라는 형식의 질문에 적합한 것이었다는 거다. 이때 취미에 대한 나의 정의가 바뀌게 된 것 같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취미'는 자신이 활동이나 사물 등에 대해 즐거움, 만족, 열정, 기쁨을 느끼고 그로 인해서 삶을 살아갈 원동력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즉, 내가 그냥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해온 일들 - 넷플릭스 틀어두고 하염없이 핸드폰 보기 같은 -은 취미활동이라고 보기 어렵지 않냐는 거였다. 아이고, 그녀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허둥지둥 그 자리에서 생각해내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정기적으로 하는 활동인 독서, 요리, 요가 등 어느 것 하나도 내게 '원동력'이 되는 것이 없었다.
뉴욕타임지에 따르면, 흥미와 취미를 구분하는 게 자신에게 맞는 적절한 취미를 찾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나의 커리어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읽는 책들은 배우고 싶은 '흥미'이지 취미가 될 수 없다는 게 설명이다.
유럽 생활을 하며 나를 놀라게 한 것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놀란 마음과 동시에 부러운 마음이 든 것은 바로 이곳 사람들이 스포츠나 운동을 하나쯤은 모두 할 줄 안다는 것이었다. 신체적인 활동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악기 연주, 그림 그리기, 만들기 같은 창의적인 활동을 하나씩은 배운 경험이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모두들 하나쯤은 '취미'가 있다는 말이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내가 학창 시절 마지막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악기 연주를 배웠던 것은 중학교 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체육조차도 제대로 된 앞구르기, 뒷구르기를 배운건 초등학생 때, 그 이후로는 허구한 날 피구만 해왔던 것 같다. 수십 명이 한꺼번에 해야 하는 특성 때문에 개개인의 역량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이후 외국어 고등학교 재학 시절 동안에는 음악시간과 체육시간은 종종, 아니 대부분 자습시간으로 치환되기 일쑤였다.
내 고등학교 시절은 진득하게 엉덩이 붙이고 앉아 수능 공부만 해내면 우리의 인생은 탄탄대로가 될 거라는 선생님, 부모님을 포함한 모든 어른들이 내세운 약속들로 채워져 있었다. 대학만 가면 남자 친구도 사귀고, 영화도 보러 다니고,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먹고, 하고 싶은 걸 뭐든지 해도 된다고. 이 말은 즉, 그러니까 3년 동안은 너의 열정과 취향과 취미를 꾹꾹 숨기거나, 참거나, 발견하지도, 발전시키지도 말고 무조건 문제집만 풀어내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 때문에 내가 열정 없는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무작정 한국 교육 시스템을 탓하려는 건 아니지만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도 한국에서 수험생활을 해봤다면, 그게 얼마나 비정상적인지 한 번쯤은 느껴봤을 거라 예상된다. 10대의 마지막 3년 동안 아침 6시에 일어나 늦어도 8시까진 등교해서(나의 모교는 7시 반까지가 등교시간이었다) 밤 10시까지 한 자리에 앉아 밥만 먹고 화장실만 왔다 갔다 하며 식사시간을 제외한 매 50분마다 10분의 쉬는 시간을 갖는 그 쳇바퀴 같은 생활이 지금의 내게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일 수밖에 없다. 심지어 대학 진학을 결정할 때도 나의 의견은 약 5% 정도에 수렴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등 떠밀려 어른들이 좋다는 대학에 그들이 좋다는 학부(흔히 말해 취업이 잘 되는 전공)에 입학한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대학 입학 후에서도 어른들의 약속과는 달리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방황하다가 자퇴를 하게 되었다. 정말 다행이게도 이제는 이런 시스템이 없어지고 있는 것 같다.
반면 유럽의 아이들은 가장 고학년인 경우에도 늦어도 4시면 집에 온다. '자율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습 진도는 숙제로 진행되고 그 숙제를 따라오지 못한다면 그것도 그 아이 개인의 책임이라고 여긴다. (참고로 네덜란드는 유럽 내에서도 좀 독특한 교육 시스템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설명하도록 하겠다.) 이토록 많은 자유 시간 내에 감당하기 벅찰 만큼의 숙제가 주어질 때도 있지만, 이 숙제의 방향성이 한국과는 조금 다르다. 적어도 내 학창 시절에는 문제집을 몇 페이지 풀어오거나, 단어를 몇 개 이상 외워오거나, 독해를 해오는 식이었다면 이곳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할 근거를 조사해서 주장을 펼치는 에세이의 형식이 주를 이룬다. 그 외의 자유시간에도 꼭 협동심과 규칙을 배울 수 있는 단체 운동을 즐겨한다.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은 축구, 필드하키, 배구 정도이다.
나는 이게 너무 부럽다. 유럽에서 유학을 하며 가장 어려웠던 것 중 하나도 이 부분이었다. 심지어 입학시험마저도 에세이 (고등학생 시절 논술 수업을 받았었지만 그것 또한 입시 형식이었기에 영어로 번역하려니 내 의견을 쓰기가 어려웠다.) 였어서 적잖이 당황한 기억이 있다. 입학 후에도 수업시간에 교수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토픽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 너도 나도 서슴지 않고 자기의 의견을 펼치는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 '자기 의견이 없는 사람'으로 가만히 앉아만 있었던 적이 종종 있었다. 나는 한 번도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연습을 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었다. 철학과 토론이 습관적으로 몸에 밴 자유로운 사상의 유럽인들 사이에서 나도 내 생각을 말하는 방법을 터득하기까지 약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 것 같다.
비슷한 맥락으로 나는 나의 취향을 찾고 갖는데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유행을 잘 따라가면 '스타일리시'하고 '쿨'하게 여겨지는 곳에서 나는 내 취향이 아닌 컬러풀한 스키니진을 입으며 자랐다. 조금만 튀거나 다른 옷차림을 하면 눈치가 보이는 곳에서 똑같은 브랜드의 후드 집업 와 패딩을 입고 자랐다. 당연히 취향이 없을 수밖에. 20대 중반에 접어들며 천천히 타임리스의 내 취향을 찾아냈다. 아직 대단한 취미는 찾지 못했다. 글을 쓰다 보니 어쩌다 '취미'라는 주제에서 좀 벗어나긴 했지만, 다 비슷한 맥락처럼 느껴진다. 남들이 하라는 대로 고분고분 살아오다 보니 주어진 과제가 없으면 뭐든지 해내기가 힘들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내 파트너는 자신의 직업을 너무너무 사랑해서 아침마다 출근하는 게 기다려진다고 한다. 10대 시절 우연히 발견하게 된 '열정'을 바탕으로 직종을 선택해 지금껏 지루해본 적이 없단다. 내겐 딴 세상 얘기만 같다. '열정'있게 '원동력'삼아하는 일을 나도 언젠간 찾아내서 아침마다 일어나는 게 참을 수 없이 기다려지는 날이 오길 바라 보며 빈 공간으로 남겨진 A3 스케치북을 다시 서랍장에 넣어뒀다. 지금 당장은 비어있어도 괜찮다. 나는 그 과정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