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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ro Jan 18. 2022

해외에서 영어 이름 없이 살아남기

멀쩡한 한글 이름을 놔두고 왜 괜히?

엄마의 말씀에 따르면 난 어려서부터 영어에 흥미를 보이고 좋아라 했다고 한다. 알파벳 노래를 부르며 흥미를 보이고 영어동요를 소리 나는 대로 따라 부르거나, 헬로 바이 땡큐를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운이 좋게도 영어 교육에 조예가 깊으셨던 당시 담임 선생님을 만나 최초로 영어동화책을 읽으며 영어에 눈을 뜨게 되었다. 


나의 흥미를 더 돋우기 위해 입학한 나의 첫 '어학원'에서는 영어 원어민 선생님들과 그룹으로, 그리고 가끔은 일대일로 수업을 받는 호사를 누리기까지 했다.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던 부모님은 일대일 수업을 고사하셨지만 당시 아빠가 부업으로 해당 학원에서 운전기사로 일하셨었기 때문에 원장님의 배려로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출처 | 수퍼루키

그렇게 만나게 된 선생님들 중 한 명과 영어 이름을 정하던 날이 아직도 기억난다. A부터 Z까지 알파벳 순서대로 나열된 가장 흔한 '영어'이름들, 그것도 '미국식'이름들 중에서 하나 고르라며 나를 쳐다보시던 백인 선생님. 우물쭈물하며 내 이름은 XX인데, 라며 정하지 못하고 있는 내게 임의로 정해주신 영어 이름, 'Whitney'가 내 첫 영어 이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기기도 하고 어이도 없는 게 'Whitney'는 엄청 구식의 영어 이름이라 우리나라로 치면 옥자 같은 느낌인 데다가 스타 가수인 휘트니 휴스턴이 절로 떠오르는 이름이니.. 아마 선생님께서는 그냥 빨리 해치우고 싶으셨겠지 싶다. 


그렇게 나는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입학까지 'Whitney'라는 이름으로 살다가, 중학교에 진학해서는 그 이름에 싫증(?)이 나기도 했고 뭔가 더 예쁜 이름이 갖고 싶은 마음에 'Elaine'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선택하게 된다. 나는 이 'Elaine'이라는 이름에 Ely, Lainy 등의 애칭까지 붙여가며 나를 동일화시켰다. 영어를 쓸 때에는 마치 다른 인격체가 되듯이, 혹은 역할놀이를 하듯이 새로운 사람이 되는 느낌이 좋았던 것 같다. 


호주로 처음 떠날 때도 나를 'Elaine'이라고 소개하는 연습을 수도 없이 했으며, 실제로 첫 6개월가량 간은 이 이름으로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만나게 된 이탈리아 지인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받게 되었다. 


"왜 아시아인들은 다 영어 이름을 갖고 있는 거야? 자기 이름이 싫어서?"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질문을 받았을 때, 비난을 받는듯한 인상에 나도 모르게 방어적인 태도로 그건 아니고, 아시아권 이름이 너희들에게 발음하기 어려워서 그런 거라며 쏘아붙였다.


"음.. 그래도 난 잘 모르겠다. 왜 너희의 이름과 출신, 문화를 서양인들에게 맞춰야 하는 거야?"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처음엔 내가 '이방인'으로서 영어권 나라에 '방문'하는 차원이기 때문에 예의를 갖추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무수한 서양권 출신의 사람들이 같은 알파벳 계열을 사용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떳떳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프랑스 출신의 지인이었던 Vincent는 자신의 이름이 빈센트가 아닌 '방-상트'라며 몇 번이고 나를 지적했었던 적도 있었다. 또 다른 이탈리아인 친구는 자신의 이름을 미국식으로 발음하는 미국인에게 깔깔대고 웃으며 따라 하고, 고쳐주는 경우도 있었다. 왜 우리만 우리의 이름을 감추고, 혹은 쑥스럽게 여기는 걸까? 자존심이 팍 상했다. 


그 상한 자존심 하나 때문에, 그때부터 내 영어 이름을 단호하게 인생에서 삭제해버렸다. 페이스북이며 링크드인이며 소셜 미디어에 난무하던 영어 이름들을 지워버리고 그 옆에 당당히 내 한국 이름을 영문으로 기재했다. 이게 벌써 7년 전이니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Elaine'이라 칭했던 것이 흑역사 아닌 흑역사가 되겠다.


출처 | 주간동아

나는 지금도 해외에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내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해준다. 한 음절 음절을 끊어서, 그리고 한 번에 이어서 또 한 번. 대부분 두세 번의 시범으로 학습이 된다. 물론, 언제나 이 방법이 잘 통하는 것도 아니다. 한글과 발음 체계가 완전히 다른 서양권 국가들은 내 이름을 뭉뚱그려 발음하거나 흐리게 발음해버리기도 하고, 잊어버리기도 해서 몇 번씩이나 알려줘야 했던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나는 점점 그런 번거로움이 가치가 있는 일들이라고 여겨지기 시작했다. 


If you want to be my friend, learn my name first.


이유는 간단하다. 내 이름을 중요시 여기지 않고 대충 발음 해버 리거나 잊어버리는 사람들은, 내게도 그만큼의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니 나도 그 사람들의 이름을 주의 깊게 듣거나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다. 반대로 내 이름을 발음하는 방법을 배우려고 하고 기억하려고 하는 이들은 내게도 똑같이 그만큼의 가치가 있기에 나 또한 비슷한 에너지와 시간을 쏟는다. 


물론 나는 운이 좋게도 영문으로 표기 시 그다지 어렵게 느껴지지 않고 발음도 딱히 엄청나게 도전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진 않다. 만약 내가 두 글자 모두 받침이 있거나 거센소리가 휘몰아치는, 영문으로 기재하기조차 힘든 이름을 가졌다면 이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영어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본인의 이름에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의 이름을 소개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화권이나 베트남권에 비하면, 한글 이름들은 딱히 어렵지도 않다는게 내 개인적인 의견이다.


의미가 거의 없거나 고작 해봐야 성경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 대부분인 서양권, 특히 유럽권의 사람들에게는 한 글자 한 글자 의미가 담긴 우리의 작명 방식을 굉장히 아름답게 여긴다. 나도 종종 내 이름을 알려주고 이건 한자에서 따왔고 한국어로 풀이했을 때 이러이러한 의미이다, 라는 식으로 설명을 해주는데 대단한 흥미를 보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자신도 한국식의 이름을 갖고 싶다고 얘기한 적도 있다. 한발 더 나아가 나는 비슷한 이유로 순우리말 이름들을 상당히 선호한다. 당연히 발음은 어려울 수 있다. 설명하고, 배우고 하는 노력을 할지 말지는 본인의 결정에 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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