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글] 121_ 색은 의미야

by 벼르

본능적으로 끌리는 컬러도 있겠지만 어릴 때는 색 자체보다는 색에 부여되는 사회적 의미를 좋아하게 된다. 각 나라마다 있는 성별로 지정된(?) 색도 그렇고, 사실은 좋아하지만 좋아한다고 말하면 놀림받기 때문에 싫어하는 척하다가, 정말 싫어져버리는 색도 있다.


1. 바다 빛깔을 따라다니던 3-12세

어린이 시절에 우리 집에는 분홍색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우연히 없다고 생각했는데 미짱이 정말 싫어했다. 분홍색을 싫어한다기보다는, 내가 여자아이이기 때문에 분홍색을 좋아할 것이라는 편견이 따라오는 걸 지독하게 싫어해서 분홍색 물건이나 장난감은 금지였다. 우리 집엔 바비 인형도 로봇도 없었다. 특정 성별의 아이가 좋아한다는 딱지가 붙은 물건은 하나도 없고 퍼즐이나 동화책, 동물 인형만 가득했다. 난 눈치가 빨랐고 왠지 내가 분홍색을 선호하면 미짱이 무서워하는 게 느껴졌다. 분홍색에서 도망다니다 좋아하게 된 색이 청록색이었다. 새파랗지도 않고 나무 색도 아닌 오묘한 청록색은 좋아하는 것만으로 특별하게 느껴지는 색이었다. 5월의 탄생석이 에메랄드인 것도 한 몫 했다. 그러다 4학년 즈음엔 민트 빛깔에 빠졌는데 그때 우린 그 색을 민트색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민트색 크레파스의 이름은 '옥색'이었다. 옥색은 왠지 낡은 이름이어서 옥색을 좋아한다고 하면 조금 놀림을 받았다. 하지만, 내가 종이에 옥색을 가득 채워 칠하면 애들도 예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시원하고 편안하니까!


2. 결국 피하지 못한 분홍의 늪

하지만 결국 난 중학교 때 분홍색을 좋아하게 되었다. 미짱이 우려하던 대로 여성스럽고 리본과 레이스가 치렁치렁한 그런 분홍은 아니었고, 검정과 매치되는 쨍한 핫핑크였다. 지금의 나와는 꽤나 거리가 먼 색 조합이라 친구들에게 말하면 꽤나 놀란다. 한참 가수 에이브릴 라빈을 좋아하던 때였는데 그때 앨범 커버가 이런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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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으로 다크한 그림을 마구 그려놓고 분홍색 하트로 가리려는 듯한, 언밸런스함이 좋았던 걸까. 그 이후로도 분홍과 검정의 조합을 쓰는 가수를 다 좋아했다. 대표적으로 2NE1이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블랙핑크가 대히트를 쳤으니 나름 취향이 앞서나갔던 게 아니었을까?


3. 그래서 지금은

아주 잠깐이지만 나는 어른을 선망한 나머지 검정과 원색 조합으로 코디했던 시기도 있다. 나에게 어울리지도 않고 색 자체도 마음에 안 들어서 금방 그만두었다. 요즘은 매년 좋아하는 색이 바뀌지만 톤은 모두 비슷하다. 하늘색, 연보라색, 분홍색, 레몬색, 민트색을 돌아가면서 좋아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때는 더욱 좋아하는 색에 의미부여를 하고, 정체성이 되기도 했던 것 같다. 청록색을 좋아하던 시기에는 바다같은 사람이 되기를 지향했었고, 검정에 핫핑크 조합을 좋아했을 때는 내 본연의 모습보다 하드함을 과시하고자 했다. 지금은 좋아하는 색과 정체성은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다. 샛노란 원피스를 입고도 험한 소리를 하고, 어떨 땐 정장을 차려입고 아이처럼 뛰어놀기도 한다.


그래도 어릴 때 좋아하던 색을 보면 그 시절의 내가 생각나서 각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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