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글] 140_ 고질병

by 벼르

예전부터 지금까지 유구하게 가지고 있는 고질병은 대책 없이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사랑에 빠지는 일은 원래 대책이 없어도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니다. 최소한의 대책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짧은 여행을 갔다가 외국인과 난데없이 사랑에 빠지면 당장 인생을 바치겠다고 마음으로 부르짖을 것이 아니라 진짜로 그 사람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상대방도 비슷한 마음인지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려보아야 한다. 내가 외국에서 살거나, 상대방이 한국으로 넘어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기나긴 롱디를 감당할 수 있는지라도 고려해보아야 한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심각한 문제는, 나는 안 그래도 누군가와 만나 관계를 맺을 때 계산기가 잘 작동하지 않는 사람인데 사랑에 퐁당 빠지면 기계가 아예 고장나 버린다는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어리석음이 연애 안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둘이 눈이 맞아서 얼빠진 행동을 하면 주변에서 그러려니 할 텐데, 짝사랑을 할 때도 나의 터무니없는 행각은 그대로이다. 장점이 있다면, 하기 싫은 일을 할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멀쩡히 사귀던 나를 차 버리고 일진에게 고백한 그 남자애를 맴돌며 계속 좋아할 때, 하필이면 체육 시간마다 오래달리기를 하는 중이었다. 이 달리기를 잘 해내면 그 애가 돌아올거라는 지극히 비논리적인 상상으로 달리기 시간을 견뎠다(그리고 단거리는 극복이 안 되어도 장거리는 어느 정도 실력에 극복이라는 게 있는지 오래달리기 점수가 꽤 높았다). 문제집 한 챕터를 풀면 박정현 노래를 한 곡 들을 수 있다는 셀프 보상으로 재수학원을 버텼다. 그리고 사랑이 원동력인 건, 미움으로 움직이는 사람보다는 좀 덜 추해 보이기도 한다.


단점이 있다면, 나중에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될 일을 벌이며 시야가 제한된다는 것이다. 도대체 나에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에게 사과하겠다고 그 사람 집 앞까지 편지를 왜 써 들고 갔는지도 모르겠고 나를 더 아끼라는 친구들의 조언은 왜 귀담아 듣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사실 그래서 오랜 친구들은 내가 사랑에 빠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번엔 또 어떤 놈(또는 대상)이 별이 정신을 홀랑 앗아갔는지 두고 보자며 의심의 눈초리를 절대 거두지 않는다. 어차피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해봤자 또 그럴 걸 알아서 이런 특성의 좋은 점이라도 찾자면, 확실히 더 많이 사랑한 쪽이 후회를 덜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음을 있는 대로 주다가도 상대의 반응이 돌아오지 않으면 어딘가 다른 곳에 마음을 빼앗기는 '팔랑 마음' 상태가 될 위험성이 점점 커진다. 사실은 지금도 짝꿍에게 심각한 권태기가 오면 대화로 못 풀어나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보다 내가 어딘가 애먼 곳에 마음을 뺏겨서 어처구니없이 관계가 종료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크다. 그러니까 내가 홀랑 넘어가 있는 그 상대방은 어느 정도의 심리적 보답은 각오해야 할 것이다. 안 그러면 내가 또 말도 안 되는 다른 대상에 마음을 빼앗길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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