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벼르 Sep 04. 2023

[별글] 145_ 빅뱅이론

  <빅뱅이론> 시리즈를 거의 여섯 번째 보고 있다. 예전에 즐겼던 컨텐츠를 다시 몰아 보면 대부분 재미가 반감되거나 보기 불편한데, 이 시리즈는 마약처럼 왜 자꾸 찾게 되는지 모르겠다. 분명 지금 보아서는 도덕적으로 찜찜한 구석이 많지만, 그 시대 치고는 최선을 다했다고 치고 흐린눈을 해주게 되어버린다. 짝꿍과 나는 빅뱅이론을 늘 같이 보는데 (누군가가 말없이 혼자 정주행을 하면 다른 한 명이 어쩐지 배신감을 느낀다) 이제는 인상적이었던 농담을 거의 외워서 대사를 칠 수 있는 정도인데도 기절할 듯 웃으며 본다. 한 편이 딱 20분이라서 밥친구로도 손색이 없고, 에피소드 형식이어서 어디를 찍어서 보기 시작해도 이질감이 없다는 것도 좋다. 


  이 시리즈를 누구에게 영업당했는지는 기억이 나는데 정확히 어떻게 보기 시작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 수능이 끝난 고3 때, 친구가 무조건 내가 좋아할 내용이라면서 추천해주었다. 그때는 넷플릭스 같은 ott도 없었고 딱히 정식으로 대여하거나 다운로드받은 기억도 없다. 친구에게 외장하드인가 메일로 파일을 건네 받았던 것 같다. 이제는 연을 끊은 친구라서 어떻게 알게 되고 구했는지는 물어볼 길이 없다. 아무튼 컴퓨터의 용량이 한없이 부족해도 빅뱅이론 파일들은 절대 지우지 않고 끌어안은 채 넷플릭스가 생길 때까지 버텼다(참고로 거의 빅뱅이론을 끊임없이 재탕하기 위해 구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넷플릭스인데 이젠 빅뱅이론 시리즈가 빠진지 오래다. 지금 빅뱅이론 시리즈는 오직 쿠팡플레이에서만 서비스한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하다보니 주요 등장인물들이 친구 같고 가족 같다. 배경이 미국의 대학원이라서 등장인물들의 평균 지적 능력이 상당히 높은데 그런 데에 비해 완벽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다. 누군가는 사회성이 박살났고 누군가는 눈치가, 누군가는 윤리관이 고장났다. 어딘가 한 군데씩은 결함이 있는 엉뚱하고 똑똑한 인간들이 모인 집단에는 나도 자주 속하며 살았어서 이 광경이 낯설지가 않다. 그리고 워낙 나의 인간관계가 우물 안 개구리에 가까워서 그런지 웬만하면 빅뱅이론을 추천했을 때 이 시리즈를 이미 알고 있거나 좋아하게 된다. 한때는 심지어 이 시리즈를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봐주는 사람이 이상형이라고까지 말하고 다녔다. 


  처음 볼 때는 캐릭터에서 주변인을 발견했다면 여러 번 볼수록 오히려 새로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빅뱅 이론> 등장인물의 모습을 읽어내기도 한다. 짝꿍에게 얼마 전에도 어떤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친구는 좀 쉘든 같은 구석이 있잖아, 라고 했는데 그 어떤 표현보다도 쉽게 와닿을 수 있게 하는 우리만의 암호처럼 여겨졌다. 고집스럽지만 밉지 않고 감정이 없는 것 같은데 사랑스럽고 진지한데 웃긴 그 친구를 이름 한 단어로 표현할 수가 있다니, 믿을 수 없이 효율적이다. 웹툰 <치즈인더트랩>의 유정선배나 손민수가 대명사가 되었듯, 빅뱅이론의 모든 인물도 내 주변에서는 이미 대명사가 되었다. 


  사실 이렇게 좋아하는 것 치고 시리즈가 종영할 때는 생각보다 덜 아쉬웠다. 물론 슬프기는 했지만 큰 이야기를 끌고가는 드라마인 <비밀의 숲>, <더 글로리>, <굿 플레이스> 등을 봤을 때보다 서운하지는 않았다. 하나의 기승전결이 존재하는 드라마를 보고 나면 그 인물들이 일상으로 돌아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쉽게 상상하기 어려워서 그런 것 같다. 빅뱅이론은, 물론 인물들의 삶의 업적이나 업다운에 따라 이벤트가 발생하기도 하고 큰 변화도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자잘한 에피소드를 워낙 많이 만났다. 지금도 그 친구들은 레너드네 집에서 피자를 먹으며 나는 재미를 찾을 수 없는 영화를 보면서 신나게 떠들고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오랜 친구들과 있었던 추억을 앨범을 보며 곱씹듯 그냥, 좋아하는 에피소드를 골라 재생하면 그만인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별글] 143_ Ditto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