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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르 Sep 06. 2023

[별글] 146_ 미술시간

  한때 화가를 꿈꾸었다고 말하면 지금의 친구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하도 오래 전 일이라서 오랜 친구들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내가 그린 만화를 좋아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내가 그림을 잘 그린다고 믿었다. 알고 보니 그림을 보려고 만화를 기다린 게 아니라 말풍선 안의 말 때문이었다는 걸, 그 시절에 그렸던 만화를 다시 보면서 느꼈다. 언제부터 미술과 멀어졌을까. 


  초등학교 때는 대부분 주제와 재료에 따라 미술시간의 내용이 정해졌다. 예를 들어 재료가 색종이, 주제가 바다 속 세상이라면 색종이를 열심히 오리고 접어 물고기와 수초, 조개 등을 만들면 되었다. 재료가 수채물감, 주제가 여름이라면 여름에 있었던 일을 자유롭게 도화지 위에 그렸다. 틀은 주제와 재료뿐, 어떤 그림을 그려도 꾸중을 듣거나 낮은 점수를 받지 않았다. 


  중학교에 들어가고 첫 미술 수행평가가 달걀 그리기였다. 오직 연필만을 이용해서, 달걀 하나를, 그림자까지 완벽하게 소묘하는 것. 내 도화지 위의 달걀은 삐뚤빼뚤해서도, 명암이 어색하게 표현되어서도 안 되었다. 손에 죽어라고 힘을 빼고 달걀 칠하기를 수십 번, 나는 지쳐버렸다. 어떨 때는 달걀이 너무 길어서 이상했고 어떨 때는 상정한 빛의 방향과 그림자의 방향이 맞지 않았다. 가장 골치아팠던 건 흰 부분에서 가장 연하게 명암이 들어가는 곳의 경계였다. 워낙 필압이 높아서 살살 그리거나 쓰는 걸 잘 못 하는데 그러다보니 있는듯 없는듯 흐린 명암이 들어가야 할 부분에 늘 동그란 경계가 생겼다. 결국 껍질이 흰 달걀을 굳이 구매하는 수고까지 들여가며 갖은 생고생 끝에 완벽한 달걀을 그려냈는데, 인생에서 소묘를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아졌다. 그리고 아마 만점에서 1점 깎인 점수를 받았다. 그러니까 주제 정도가 아니라 그려야 하는 대상이 정확히 정해져 있었고, 나의 자유는 전혀 없었다. 깨진 달걀을 그려서도, 날아가는 달걀을 그려서도 안 되었다. 그저 얌전히 책상 위에 있는 달걀을 연필로만 그려내야 했다. 


  다음으로 난관에 처했던 건 조각이었다. 나무를 깎아서 사람 머리통을 표현해야 했다. 다른 선택지도 없이 두상을 만들어야 하는데 하필 나무를 깎아야 하다니. 시작하고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손에 상처가 여섯 개 생겼다. 보다 못한 미짱이 큰 부분을 깎아내는 과정에서 도움을 주었다. 세부적인 부분을 다듬으면서 상처를 몇 개 더 얻었지만 그보다는 점수가 중요했다. 혼신의 노력으로 만든 나무 조각으로 꽤 좋은 점수를 받았지만 다시는 조각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미술의 장르가 하나하나 쌓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거라곤 펜으로 단순하게 그리는 캐릭터 정도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내가 가장 좋아하던 형태의 그림이며, 한 번도 수행평가로 갇히거나 재단된 적 없는 형태이다. 어찌나 다양한 장르의 미술을 다뤘는지, 새로이 도전하고 싶은 미술의 장르가 없을 지경이다. 그러니까 내가 미술을 지긋지긋해한다는 걸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반복하고 반복해서 아주 조금씩 나아지는 그런 장인 정신은 나에게 없는 종류의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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