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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르 Oct 09. 2023

[별글] 172_ 모국어

  모국어는 나에게 갑갑함을 해소해주는 통로이자 내가 어디든 가지는 못하게 만드는 족쇄이기도 하다. 나는 이중 언어 사용자까지는 아니지만 L1(모국어)과 L2(첫 외국어)인 영어의 수준 차이가 그리 크게 나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모국어를 사용하고 받아들이는 속도와 영어를 활용하고 소통하는 속도를 비교할 수는 없다. 굳이 비교하자면 영어로는 SNL 정도의 개그를 고심하지 않고 구사할 수 있다면 한국어로는 스탠드업 코미디를 한두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래서 나는 한국어를 읽고 쓸 때 답답하지 않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살아있는 기분이 든다. 영어를 읽고 쓸 때도 심리적 장벽이 크지는 않다. 비교적 자유롭게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내가 원하는 바를 표현할 수 있다. 다만 한국어를 쓸 때보다 훨씬 느리고, 표현이 단순해진다. 


  이 지점이 바로 족쇄이다. 만약 내가 수영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라면(사실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나를 보고 물개 같다고 할 수도 있고 지금보다는 물에 훨씬 편하게 접근하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뭍에서 훨씬 편하게 걷고 뛰고 이동할 수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내가 이민에 대한 욕구를 표시하면, 너 정도 영어 실력이라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연히 갈 수야 있겠지만, 영어권 사회 안에서 소통하면서 느끼는 해방감이나 행복은 한국어권 사회 안에서의 그것과 차원이 다를 것이다. 


  모국어가 아니고서는 느끼지 못하는 미묘함이 있다. 영어로는 subtlety라고 하는데, 완전히 직접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지만 뉘앙스에서 느껴지는 의도나 감정을 우리는 모국어에서 가장 잘 읽는다. 예를 들어서 '걔가 그런 말을 해서 기분이 좀 그랬어'라는 말을 영어로 도대체 어떻게 표현할 것이다. 기껏해야 "What he said made me feel like.... you know."라고 퉁칠 것이다. '너도 알지?'는 '좀 그래'랑은 대척점에 있지는 않지만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이 미묘함에 대한 해소가 없이는 대화 끝에 약간의 찜찜한 마음이 남게 마련이다. 


  아마 나를 인지적으로 자유롭게 해주는 모국어에 감사하다는 방향으로 글을 마무리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나의 첫 언어라서 사랑하는 만큼, 모국어가 한국어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도 크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 사랑할 수밖에 없지만 한국어 문화권 안에 내 자유가 갇혀 있어서 다소 갑갑한 심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의 한류 열풍이 반갑다. 내가 L2를 모국어만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없을 거라면 L1의 반경이 최대한 넓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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