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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르 Oct 14. 2023

[별글] 173_ 발표에 관하여

  학부생활만 거의 10년차(세 번째 학교이니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석사 학위까지 있으니 지금쯤이면 발표에는 도가 틀 법도 한데,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영역 중 하나이다. 내가 발표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바로, 발표의 퀄리티가 들인 노력과 비례하지도 않고 반비례하지도 않고, U자 커브를 그리기 때문이다. 물론 앞쪽의 선이 조금 짧고 뒤쪽의 선은 조금 높은, 기울어진 U자라고 할까?


  어느 정도 내용 숙지가 되어 있다는 가정 하에, 발표 준비를 거의 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하는 발표가, 조금 성의 있게 대본도 쓰고 대본을 외우려고 노력도 해본 발표보다 오히려 더 낫다. 나의 대본 의존도는 아주 높거나 아예 없다. 키워드를 적어두고 중요한 부분을 말했는지 안했는지만 확인하면서 청중과 계속해 눈을 맞추는 발표가 가장 이상적이겠으나, 나는 대본에 코를 박고 줄줄 읽거나 아예 대본 없이 발표해서 중요한 부분을 한두 개 놓친다. 어느 정도 노력을 하면 대본이 있다는 뜻인데, 대본이 있는 이상 활용하지 않기는 또 아까워서 아예 대본을 대놓고 읽게 된다. 당연히 대본을 줄줄 읽으면 발표가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그래서 아예 노력을 하지 않았을 때가 훨씬 낫다고 말하는 것이다. 눈도 맞추고 반응도 살피고, 중요한 건 한두가지 빼먹을지라도 발표를 듣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잘한다'고 느낄 법한 발표를 한다. 중요한 포인트도, 치명적이지는 않을 뿐더러 꼭 필요하다면 질의응답 시간에 보충하면 그만이다. 


  물론 대본을 달달 외워서 툭 치면 발표 내용이 나올 만큼 연습하고 숙지하면 100점에 가까운 발표를 할 수도 있다. 이정도 되면 발표에서 남은 시간을 가늠해가면서, 시간이 남으면 괄호 안의 문장을 말하고 시간이 모자라면 말하지 말자, 정도까지도 계산할 수 있다. 발표 시간이 엄격하게 정해져있을 때는 피피티 넘기는 시간까지도 계산한다. 하지만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아도 70점짜리 발표를 할 수 있는 사람 입장에서, (심지어 노력이 완벽하지 않으면 오히려 50점짜리 발표로 떨어지는 사람이다) 그냥 준비하지 말자는 쪽의 유혹이 너무 강렬하다. 그나마 조원들이 있는데 내가 발표자인 경우에는 조원들을 안심시켜 줘야겠다는 억지 동기로 대본을 작성하긴 하는데 혼자 발표하는 경우에는 대본 없이 가자는 주의이다. 


  정직하게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발표의 퀄리티가 올라가는 시기가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서 모든 발표가 Zoom으로, 그러니까 비대면으로 대체되었을 때다. 카메라에는 보이지 않게 대본을 아주 작은 글씨로 만들어서 모니터에 잔뜩 붙여놓고 한장씩 떼어가면서 발표를 하면, 자연스럽게 카메라와 아이컨택을 하면서 '나는 지금 대본을 읽는 게 아니고 발표를 하고 있답니다'의 느낌을 낼 수 있다. 대학원 시절 중요한 발표를 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때는 발표 실력이 전혀 늘지 않았었다. 


  발표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사람들 앞에 나가 뭔가 떠드는 건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느냐, 나는 발표를 잘 하는 사람이냐 물으면 자신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다. 언젠가는 준비한 정도와 발표 퀄리티가 정비례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대본이 있어도 대본에 코를 박지 않고 적당히만 의존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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