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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르 Oct 14. 2023

[별글] 174_ 결혼

* 주의: 이 글은 현실주의자들이 읽기에 거북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남자친구가 축의금을 낼 때마다 메모를 해둬요'라는 요지의 글을 보았다. 아마 작성자는 계산적인 남자친구의 모습에 놀란 것 같았다. 그런데 댓글 반응이 나에게는 놀라웠다.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당연히 기록해두어야 하는 것이라고 반응한 것이다. 지금까지 지인들이 아직 많이 결혼한 시점은 아니라서 결혼식을 많이 가지는 않았지만, 한 번도 내가 얼마나 냈는지, 나중에 얼마나 돌려받아야 하는지 기록할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나는 축의금을 다소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 축하하는 뜻을 담아서 그 마음만큼 봉투에 담는다. 물론 마음을 정확하게 반영할 수야 당연히 없지만, 적어도 그때의 내 지갑 사정이 허락하는 한에서 그냥 그 마음을 담아서 내고 그러고 나서는 잊는다. 진짜로 똑같이 돌려받아야 한다면 뭐 인플레이션까지 반영해야 하는 건가 하는 조금은 우스운 생각도 해봤다. 


  그렇다면 나에게 결혼이 뭐냐, 라고 묻는다면 숫자 빼고 전부다. 숫자는 어쩔 수 없이 개입되는 것이며 그 숫자가 본질을 흐리는 건 허락할 수 없다. 하객의 수보다는 새로 시작하는 부부를 진심으로 축하하는 사람들이 모였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식대의 금액보다는 하객들이 얼마나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물론 그건 좀 비례하는 측면이 있긴 하다).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축하를 빌미로 한 자리에도 모을 수 있는, 그러니까 생일파티에도 못하는 거대한 스케일의 축하 파티를 벌이는 날이다. 그런 날 내가 숫자만 생각하고 있으면 너무 슬플 것 같다. 


  결혼 상대를 고를 때도 무엇이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숫자 빼고 전부다. 일부러 재력이 부족한 사람을 찾아다니지는 않겠지만 평생(이 아닐 수 있더라도 일단은 평생을 상정하고) 함께 놀 짝꿍을 구하는 건데 숫자만 생각하고 있을 수는 없다. 내가 행복해하는 활동을 같이 할 수 있는지,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지가 너무나 중요해서 돈이나 직업 같은, 남들이 말하는 '현실적' 조건들은 뒤로 밀리고 밀린다. 몇몇 친구들은 이런 얘기를 들으면 그건 연애 때나 해당하는 거고 결혼은 현실이라고 말한다. 정말 그런 거라면 그냥 내가 하는 건 평생 연애고, 결혼은 흉내만 내는 거라고 인정하겠다. 남들이 내가 진정한 결혼을 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 어쩔 수 없지. 그래그래 내가 한 건 결혼이 아니로구나 하고 장단을 맞춰줄 수밖에.


  나에겐 그냥 결혼은 내가 선택해서 가족을 만드는 일이고, 가능하다면 깨지 않을 사랑의 울타리를 치는 일일 뿐이다. 결혼 문제로 싸우는 사람들을 보면 쓸데없이 숫자가 끼어들어서 그런 것 같다. 본인에게 숫자가 정말 중요하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결혼의 본질은 무엇인지, 자신에게 결혼이 어떤 의미인지 각 개인이 고심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한다. 숫자에 매이다 보면 시간이라는 있지도 않은 타이머에 초조해져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해버릴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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