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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르 Oct 25. 2023

[별글] 178_ 공포

  숨가쁘게 바쁜 일이 끝날 때쯤 전화를 받는다. 놀랍게도 파트타임 업무를 제안하는 연락이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거절하기도 어렵게, 진짜로 시간이 하나도 없을 때는 그런 연락이 안 온다. 돈이 부족할 때는 상대적으로 재미없고 어려운 일이 들어오고 삶이 무료할 때는 도전적이고 재밌는 일이 들어온다. 이런 걸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는 일복이 많다고 축약해서 말할 수 있는데, 내 인생에 미치는 영향은 당연히 그 이상이다. 그 일이 타이밍이 안 좋게 서로 걸려 넘어지고 중첩될 때는 감당이 안 되는 시기가 있다. 주로 장기 프로젝트와 학사일정 등이 내가 잡은 일과 의도치 않게 얽힐 때 이런 일이 생긴다. 


  그럴 때면 늘 잠을 제대로 못 잔다. 할일이 많아 바빠졌으니 잠에 들기까지의 시간은 짧아지는데 일정을 놓칠까봐 몇 번씩 잠에서 깨서 시간을 확인하고, 알람이 제대로 맞춰져 있는지도 확인하고서야 다시 잔다. 이때 꾸는 악몽도 정해져 있다. 해야 할 일을 잊고 어딘가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다가, 지금 도대체 어디냐고 누군가 나를 찾는 전화가 오는 꿈이다. 가려면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위치라서 당장 출발하더라도 한참 늦는 그런 꿈. 가는 길 내내 초조함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식은땀을 흘리다보면 또 놀라서 잠에서 깨게 된다. 과각성, 과기능 상태라고나 할까. 지금도 그런 시기이고 휴식이 절실하다.


  이런 시기에 가장 공포스러운 건, 내 마음의 에너지가 바닥나서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드러누우면 어쩌지 하는 것이다. 몇 주 전에도 '싫어싫어 병'에 걸려서, 시험 전날인데도 공부하기 싫다며 10분에 한 번씩 침대에 몸을 던졌다(단순 암기과목이어서 더 싫었던 것도 있지만). 마음이 파업하면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나는 해야 하니까 그냥 하는 인간은 못 되기 때문이다. 할일이 적은 상태에서 잠시 파업하면 다시 정신차리고 시작하면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지만, 할일이 많은 정점에서 모든 걸 집어던지면 수습조차 되지 않는 데다가 주변에도 엄청나게 민폐를 끼친다. 


  수업을 열한 과목 들으면서 일복이 많은 사람이 되기란 쉽지 않다. 재미로 사주를 보러 갔던 날 사주를 봐주는 사람은 나에게 말했다. 너는 일을 해야 할 팔자인데 왜 자꾸 공부를 하려고 하냐고. 그러게 말이다. 팔자에도 없는 공부 욕심을 부려서 엄청난 체력을 타고났는데도 자꾸 아슬아슬하게 다 쓰게 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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