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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르 Oct 25. 2023

[별글] 179_ 시의 계절

  이 시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는 시 한 편 없고, 적극적으로 시를 찾아 읽을 줄 아는 사람도 아니지만, 나는 시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고등학교 때 나는 시문학을 정말 싫어했다. 고전 운문은 말할 것도 없고 현대 운문도 짜증났다. 싫어했던 이유는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삶의 경험치도 지금보다 부족했던 데다가, 그 와중에 속독이 습관인 사람이라 시를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다 시는 천천히 읽어야 이해할 수 있는 언어라는 말에 꽂혀 느닷없이 필사를 시작했다. 한 줄 한 줄 손이 쓰는 속도로 읽으니 겨우 마음에 시가 한 구절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해에 나는 수능특강과 수능완성에 있는 운문 문학을 모조리 필사했고 운문 파트 문제를 다 맞힐 수 있었다. 그래서 수능과 멀어져 살면서도 나는 매년 연계된 시를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 읽곤 한다. 서점의 시집을 찾아 읽긴 어려워도 이 정도는 읽으라고 엄선된 시를 받아먹기까지는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올해의 연계 시에서도 좋아하게 된 작품들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1. 길(윤동주)


어쩌면 너무나 유명한 시이지만 첫 두 줄과 마지막 두 줄은 언제 읽어도 마음을 꽝 때린다. 무엇을 찾는지조차 모른 채 그리워하는 마음을 수시로 겪는 나에겐, 이 문장조차 찾아다니다 드디어 찾았다는 느낌이었다. 막연한 그리움은 나에게 갈망이 되지만 그 갈망은 또 삶을 유지하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2.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정호승) 

정호승 시인의 시야 수험생 때도 많이 읽었지만 이 시는 처음 접했다. 시라기엔 굉장히 직관적이어서 그냥 내가 평소에 하는 생각을 에세이처럼 적어둔 것 같았다. 손의 속도에 눈이 몇 번이나 걸려 넘어져야 비로소 이해되는 시도 당연히 좋지만, 이렇게 한 눈에 봐도 내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시도 소중하다. 어쩌면 요즘 나는 인생의 양면성을 인식하고 견디는 시기를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즘은 절망 없는 희망은 밋밋하고 희망 없는 절망은 공허하게 느껴진다. 


3. 봄(이성부)

사실 이미 익히 알고 있던 시는 고르지 말자고 생각했으나 이 시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재작년 이맘때부터 나는 봄이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주문처럼 되뇌이는 사람이 되었다. 소신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사실 믿고 싶어서 반복하는 말이기도 하다. 부디 나의 봄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봄이 싸움을 두 판 세 판까지는 하지 않고 바람의 부름에 금방 응답하기를.


4. 성에 꽃(문정희)

고르고 보니 모든 시가 한 방향을 향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시는 특히 읽으면서 장면이 잘 그려져서 더 매력적이다. 내가 겨울 새벽에 추워서 잠에 깼는데 커텐을 열다 성에 꽃의 광경을 본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시 이후에 '한 방울 물로 스러지는' 성에를 보며 시인이 했을 법한 생각까지도 나에게 남기는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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