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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르 Nov 12. 2023

[별글] 187_ 한복과 아메리카노

  어릴 때 나는 한복을 참 싫어했다. 한복을 입고 공연하는 행사가 특히 별로였다. 꼬맹이들이 한복을 입고 꼭두각시 춤을 추면 어른들이야 귀여워하겠지만 정작 꼬맹이 입장에선 불편할 따름이다. 맨날맨날 헐렁한 체육복만 입고 놀이터에서 뒹굴다가 입는 유일한 '불편한 옷'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어른이 되어서 한복 말고도 수없이 많은 불편한 옷들을 입게 되면서는, 한복이 그렇게 불편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래서 놀러가서 친구와 함께 한복을 입을 기회가 생기면 마다하지는 않게 되었다. 


  다만 한복을 입을 때의 두 가지 소신이 있다. 우선은 와이어가 들어간 한복은 절대 싫다는 것이다. 서양식 옷에서는 페티코트라고 부르는, 풍성한 속치마를 구현하려면 옷감이 무지 많이 들고 와이어로 둥글게 만들어둔 뼈대보다는 덜 풍성해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일부 한복 대여점에서는 간편하게 철사로 된 속치마를 활용한다. 치마가 잘만 그대로 있으면야 얼핏 풍성해 보이지만 바람이라도 살짝 불면 치마 안에 동그란 철사가 있다는 게 티가 분명히 난다. 그 모습이 너무 못나 보여서, 나는 늘 가던 집만 가서 비슷한 디자인을 입는 한이 있더라도, 덜 풍성해 보이는 천으로 된 속치마가 있는 집에 간다. 그쪽이 다니기에도 훨씬 편하고 눈으로 직접 보면 훨씬 훨씬 예쁘다.


  두 번째 소신은 손에 아메리카노를 들고 다니는 것이다. 뜬금없이 웬 아메리카노냐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한복을 입었다고 '옛날 컨셉'을 잡는 걸 견디지 못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의도적인 시각적 부조화를 만든다. 대화 소재도 잘 골라야 한다. 일부러 사회 변혁적인(?) 이야기를 한복을 입고 잔뜩 하면, 원래는 10년쯤 앞섰다고 생각한 내 사상이 200년 쯤은 거뜬히 앞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한옥마을에선 아메리카노뿐 아니라 아이스크림이나 마카롱 등 온갖 최신의 디저트를 들고 다니며 부조화로 세련을 창출한다. 


  입다보니 그 나름의 맛이 있어서 작년에는 평소에 입을 용도로 개량한복을 하나 사긴 했다. 입고 보니 지나치게 한문 선생님 같아서 자주 입지는 않지만 말이다. 한복은 애증하는 내 나라의 여러 상징물 중 하나로, 입고 있으면 마음이 복잡해져서 어차피 오래 입지는 못한다. 그래도 웬만하면 언젠가는 한복과 온전히 화해하고 싶고, 나랑 가장 잘 어울리는 한복 하나쯤은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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