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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르 Jan 11. 2024

[별글] 207_ 유전자의 힘

  얼마 전, '3단 사고'를 쳤다. 1단계. 요리를 하다가 인덕션 위에 꼬인 코드 줄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데워버려서 식기세척기 전선을 태워먹었다. 2단계. 식기세척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관계로 맨손으로 설거지를 하다가(나는 고무장갑을 끼고는 도저히 설거지를 못 하겠다) 세제가 독해서 손가락 살갗이 벗겨졌다. 3단계. 식기세척기 전선을 수습하려면 니퍼와 절연 테이프가 필요했는데 둘 다 본가에만 있었다. 그리고 본가를 세 번 방문하는 동안 니퍼를 가져오는 것을 새까맣게 잊었다. 부주의함, 화학 제품에 약한 피부, 덜렁거림은 모두 만짱의 특성이다.


  사실 만짱의 피부가 물과 화학 제품의 콜라보에 약한 줄은 몰랐다. 나는 내 몸의 예쁜 구석(큰 눈이라거나 흰 피부라거나)은 모두 미짱에게서, 튼튼한 구석(웬만하면 아프지 않는 면역력이라거나, 세 시간도 거뜬히 걸을 수 있는 지구력이라거나)은 모두 만짱에게서 온 거라 생각했다. 거꾸로 말하면 못난 구석은 모두 만짱에게서, 연약한 구석은 미짱에게서 받아온 것이라고 알게 모르게 생각한 부분도 있다. 그래서 피부가 녹아서 미짱에게 가볍게 칭얼거렸을 때, 미짱이 나직하게 '너네 아빠도 그러는데-'라고 말했을 때 조금 놀랐다. 만짱에게도 튼튼하지 않은 구석이 있구나. 그걸 내가 받아온 부분도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미짱은 수영도 곧잘 배우러 다니는데, 만짱은 바다에 잠깐만 들어가도 힘들어했던 것 같다. 물에 피부가 약한 사람은 만짱 쪽이구나, 새삼스러웠다.


  빤한 구석은 어쩐지 신기하지 않다. 늘짱이랑 나는 늘 이목구비는 닮았는데 분위기는 전혀 반대라는 말을 듣는다. 나는 한 눈에 보면 만짱을 닮았고 웃는 얼굴은 미짱을 닮아서, 얼굴에 표정이 쌓여갈수록 얼굴이 미짱 쪽으로 흐르는 중이다. 그런 건 하나도 새삼스럽지 않은데, 미짱이 옷에서 뜯어내던 라벨을 나도 못 견뎌서 전부 잘라낼 때라거나, 만짱이 자주 깨던 유리컵을 내가 자취방에 와서 깨먹을 때는 조금 놀랍다. 가끔은 완전히 미짱과 만짱과는 독립된, 새로운 개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이런 이상한 디테일에서 닮아있을 땐 내가 이 부부의 딸이 맞는구나 실감하게 된다.


  나와 친한 친구들은 아직 아무도 아이를 가진 사람이 없지만, 친구의 친구라거나 친구의 언니나 오빠라거나- 등등 건너건너에서는 출산 소식이 들리는 요즘이다. 아무래도 부부 양쪽을 다 아는 게 아닌 이상, 아이가 자기 지인을 닮기를 바라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나보다. 조카가 언니는 안 닮고 형부만 닮아서 서운하다거나, 친구의 아기가 친구는 하나도 안 닮고 남편 얼굴만 보여서 속상하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내가 보기엔 전혀 의미가 없다. 어차피 아기 때 얼굴이 누구를 조금 더 닮았느냐는 아주 잠깐의 희비만 가를 뿐이다(그리고 솔직히 제3자의 눈으로 보기엔, 당연히 양쪽 다 닮았다. 아무래도 낯선 얼굴을 더 먼저 읽게 되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다). 어차피 몇 년이 지나면, 아니 몇십 년이 지나서 아이가 성인이 되어서, 완전히 다른 개체로 느껴지는 그 순간에도, 이상하게 '이걸 닮아?'하는 부분을 평생 발견할 것이다. 그런 발견이 평생 이어질 수 있다는 게 유전자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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