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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르 Jan 14. 2024

[별글] 209_ 메이크업

  대학가에서 2012년과 2016년 사이에는 뭔가 대격변이 일어났다고, 그 시절에 대학에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요즘 친구들은 믿어주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2012년, 내가 새내기 때는 화장에 대한 선배들의 간섭이 꽤나 있었다. 뭐 물론, 일부 보수적인 회사에서 그런 것처럼 '화장을 하고 다녀야 예의지!'라고 혼이 났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그렇지만 가끔 나를 생각하는 언니들이 조심스럽게 나를 불러내 혹시 화장을 할 줄 몰라서 안 하고 다니는 거냐고 묻기는 했다. 가끔 세심한 오빠들도 저 언니가 화장을 잘 하니까 가서 배워보는 건 어떠냐고 묻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귀찮아서, 그리고 화장에 재능이 없어서 맨얼굴로 다녔지만 어떤 거대한 반항기를 품고 그런 건 아니었다. 그때의 나는 소위 말하는 '똥손'이었고 화장을 하면 할수록 거울 속의 나는 이상해졌다. 그래도 이 대화만큼은 분명히 기억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눈썹이 비뚤다고 지적했나, 정리가 제대로 안 되어 있다고 지적했나.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아, 나는 평소에 화장을 안 하고 다녀서-"

  "좀 하고 다녀, 그러면."

충격적인 대답이었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못 할 대답이었다. 강의실에는 언제나 또각또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학번 선배들은, 그리고 한껏 어른이고 싶던 동기들은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다녔기 때문이다. 나는 한 세 번 정도 신어 보았나. 그리고 너무 불편했던 나머지 그냥 키가 작은 채로 살겠다고 선언했다. 


  아직도 속으로는 화장이 예의라고 생각하는 꼰대들이 있을 수는 있겠으나, 적어도 그 말을 입밖으로 내지는 않는 문화가 2016년 무렵에는 완전히 정착했다. 그 사이엔 남자친구가 왜 자기를 만날 때 화장을 안 하냐고 물어서 굉장히 짜증났던 적도, 싸구려 화장품을 잘못 써서 피부가 온통 뒤집혔던 적도 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나는 화장에 대해 미적지근한 태도였다. 오히려 끝도 없이 화장품을 사고 하루라도 맨얼굴로 외출하면 세상이 뒤집히는 줄 알았던 친구들이 하루아침에 화장품을 깨부수고 멀리하는 경우가 있었다. 나는 기분이 좋을 때면, 중요한 자리에 나갈 때면, 약속 시간까지 애매하게 시간이 남으면 즐겁게 화장대 앞에 섰다. 늘 가까이 하는 친구도 아니지만 피하고 적대하는 사람도 아닌 친구처럼. 그런 적당한 거리 사이에서 야금야금 화장 실력도 늘어서, 이제는 내 손으로 화장을 해도 못봐줄 정도는 아니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흘러 다시 대학으로 돌아온 지금, 동기들은 서로의 맨얼굴을 자연스러워한다. 누구도 화장을 강요하지 않고 누구도 매일같이 화장을 하고 다니지도 않는다. 아마 롱패딩을 겪고 나서 이전의 옷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화장으로부터 자유로운 문화도 역행할 순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내킬 때만 내키는 만큼만 얼굴을 꾸며내는 지금의 문화가 꽤나 마음에 든다. 예전에는 후배들한테 화장 좀 하고 다니라고 선배들이 간섭했다고 하면, 아마 지금의 동기들은 못 믿거나, 예전엔 진짜 꼰대 문화였구나 하며 혀를 차겠지. 그 옛날의 선배들에게도 전혀 악의는 없었다는 데에서 문화의 힘을 실감한다. 


  내 얼굴은 화장을 최소한으로 해야 예쁜 얼굴이다. 스모키는 가당치도 않고 새빨간 입술도 소름이 끼칠 만큼 안 어울린다. 눈꼬리를 살짝만 늘리고 음영도 아주 살짝만, 입술 색도 아주 살짝만. 그러면 놀라울 만큼의 변화는 없지만 확실히 사진은 잘 나온다 싶은 얼굴이 된다. 그렇지만 또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는 탓에, 해봤자 소용이 없구만~ 하면서 허망하게 지워낸다. 그러고 나면 한 달 간은 화장품을 거들떠도 보고 싶지 않아진다. 여전히 데면데면한 친구와 지내는 것처럼, 화장과는 그렇게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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