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글] 28_ 내가 알던 세상이 깨졌을 때

by 벼르

내가 스물 세 살 때 이름과 얼굴만 알던 친구가 죽었다. 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따지자면 서로 싫어하는 쪽에 가까웠다. 나는 재수학원에서 겉돌 수밖에 없는 존재였고, 그 친구와는 재수학원에서 만났으니까. 나는 서강대를 휴학하고 여름에 공부하러 들어온, 좋은 입결이 예상된다는 이유로 학원비도 적게 내는 애였다. 그 특수성 때문에 가까워지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눈을 흘기는 애들도 있었다. H는 후자였고 나는 걔한테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 해도 나쁜 앤 아니었다. 어렸을 뿐이다. 그런 애가 뜬금없이 교환학생 도중에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했다.


사회심리학 이론 중 공정한 세상 가설이라는 게 있다. 사람은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이 세상은 정의로울 것이라고 믿는다는 가설이다. 착한 사람은 상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으리라는 믿음이다. 이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너무 우울해진다. 어떤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남몰래 가정한다. 그래야만 나에게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 때문에 성범죄 피해 등에서 피해자를 탓하는 태도가 등장한다. 옷을 어떻게 입었냐고 묻거나, 여지를 주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특별히 우리가 나빠서 그런 게 아니다. 결백한 피해자의 존재는 심리적으로 불편하다. 그러면 결국 나도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피해자를 탓하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아무튼 내 안에서도 공정한 세상 가설이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었고, 내가 보기에 H는 그렇게 이십대 초반에 죽어버릴 만큼의 잘못이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그 간극이 나를 미치게 했다. 내가 패닉하자 친구들은 당황했다. 왜 그러냐고, 걔랑 별로 친하지도 않았지 않냐고 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H와 나의 관계는, 아무리 좋게 포장해줘도 우연히 마주치면 어색하게 인사하는 정도였다. 다만 나는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이 깨져서 패닉했다.


나는 그때까지 다 참았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사람과 사귀었다. 친구들 생일을 챙긴다고 내 밥을 굶고 다녔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보다 나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놀았다. 그렇게 다 참고 남을 위해 살다 보면 언젠가 보상받겠거니 생각했다. 불시에, 타의로, 삶이 끝나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은 그 기대를 와장창 깨뜨렸다.


https://youtu.be/jBxZ7RC8Ouw

사실 내가 오늘 하고 싶은 말은 가수 요조 님이 이 영상에서 다 하셨다. 요조 님은 사고로 여동생을 잃고 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셨다고 한다. 사람을 사고로 잃는다는 건 주변 사람들에게 비슷한 메아리가 되나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별글] 27_ 달 달 무슨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