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종교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성당에 다니겠다고 결심한 적이 없다. 그냥, 기억이 있을 때부터 세례명이 있었고 미짱 품에 안겨 때로는 신자석에, 때로는 유아방(아이가 있는 신자들이 편히 미사를 볼 수 있도록 마련해둔 작은 공간)에 앉아 있었다. 그렇다고 엄청 독실한 신자냐고 하면 절대 아니다. 특별한 이유 없이 미사에 빠지기도 하고, 특히 4성부 합창 없는 미사는 굉장히 지루해하는 나다. 그런데 또 가톨릭 신자의 정체성이 없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다. 전 생애에 걸친 성당에서의 경험은 알게 모르게 나를 이루었다. 가끔 주객전도가 되긴 하지만 매주 노래하러 꼬박꼬박 미사에 나간다.
그 과정에서 나는 신과 가까워지기도 멀어지기도 했다. 어떨 때는 세상이 너무 아름답고, 세상을 만든 신의 사랑이 크게 다가오다가도 회의적인 자아가 툭 튀어나올 때는 신은 있는가부터 시작해서 있어도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하고 침대를 팡팡 치며 화를 내기도 한다. 막상 천주교나 내가 믿는 신이 공격을 당하면 방어적인 마음이 된다. 까도 내가 깐다는 마음인지, 너무 미워하지는 말라는 심정이 되어버린다. 어떨 때는 심지어 내가 천주교인 전부를 대변한다는 착각으로 무리해서 좋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 전도는 종교를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종교의 부작용이랄까.
날 때부터 종교인인 사람이다보니, 자연발생하는 종교인이 다소 신기하다. 오늘도 세례준비반에 새로 등록한 예비신자 분들이 성당에 왔는데, 신기해서 자꾸 쳐다보게 되었다. 어떤 계기로 오셨나요. 누가 오라고 해서 오셨나요, 살다보니 종교에 기대고 싶어졌는데 성당이 그나마 괜찮아 보였나요. 이럴 때면 천주교가 나름대로 재미있는 종교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건지, 괜히 미사가 빨리 끝나기를, 신부님의 강론이 조금이나마 재밌기를 바라게 된다. 야속히도 오늘 미사는 너무나도 길었고 강론은 교과서 같았다. 아는 친구가 예비신자로 미사에 참여했는데 계속 그 친구의 표정을 살피게 되었다. 가족을 남에게 소개하면 이런 기분일까. 우리 가족 그래도 나름대로 좋은 사람들이에요. 절연하려고 하다가도 으이그 하면서 다시 돌아오게 된답니다.
그런데 가족에 비유하기에는 민망할 만큼 신은 내게 멀다. 나는 아주 힘들 때를 제외하고는 신을, 종교를 자발적으로 찾지 않는다. 가끔은 교회의 가르침과 내가 생각하는 옳음의 방향이 달라서 심술을 부리듯 신과 멀어진다. 어떨 때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신이 전혀 지켜주지 않는 것 같아 화가 나서 심리적으로 멀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멀고도 가까운 당신'이라는 제목을 봤을 때 나는 내가 믿는 신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나는 딱 가톨릭 성가 210번의 3절에 해당하는 신자다. 그 성가는 봉헌 성가로, 신에게 예물을 바치는 전례 중 부르는 노래이다. 1절은 나의 생명을, 2절에서는 나의 삶을 드리니 주여 받아주소서. 하는 성가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1절은 생명을 바친 순교자를 위한 노랫말이며 2절은 삶을 바쳐 신을 섬기는 성직자를 위한 노랫말이다. 3절은 나의 음성을 드리니 받아달라는 내용이다. 초등학생 때 성가대를 지도하는 선생님이 이 노래의 3절은 우리 성가대를 위한 부분이라고 설명해주셨다. 그래서 3절까지 이르지 못하고 2절에서 마무리할 때에는 괜히 서운하기도 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삶이나 생명을 바치는, 성직자나 순교자까지는 못 될 것 같아서 그렇다. 그래도 음성(정도는?)을 드리니, 받아주소서 하는 마음으로 매주 성당에 간다. 지루함에 약한 성가대원이 나만은 아닌지 3절의 가사 마지막 부분은 '깨어있게 하소서'이다. 그 부분을 부를 때면 괜히 찔린다. 제가 당신이 지루하게 굴 때면 가끔 몸을 비틀며 졸려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예쁘게 봐주세요. 나의 멀고도 가까운 분이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