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글] 40_ 퐁당퐁당 사랑에 빠지자

by 벼르

사랑에 잘 빠지는 나는 언제나 좋아하는 대상이 있다. 그래서 덕질의 역사도 길다. 초등학교 때는 자두를 좋아해서 좋아하지도 않는 김밥 노래를 부르고 다녔고, 중학교 때는 에이브릴 라빈을 좋아해서 미짱을 조르고 졸라 내한 공연에 다녀왔다. 그러나 본격적인 덕질의 시작은 역시 스마트폰이 손에 들어오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렇게 잔잔히 에이브릴 라빈, 윤하, 에픽하이, 박정현을 거쳐 어른이 되었다. 덕질을 가장 열심히 했던 기억은 2018-2019년 무렵이다. 짝꿍이 교환학생으로 일본에 가면서 마음을 둘 대상을 호시탐탐 노리던 나는 지하철 광고를 보고 한 모바일 게임을 설치하게 된다. 지금은 게임의 이름을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이지만 당시에는 스토리형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을 처음 해봐서 퐁당 빠져버렸다. 남자 주인공들은 전형적이었다. 돈 많고 시크한 사람, 무뚝뚝하지만 나에게만 다정한 사람, 어마어마하게 똑똑한 사람, 그리고 햇살처럼 밝고 해맑은 사람. 난 팬덤이 가장 작은 마지막 주인공에게 빠져버렸다. 왜 그 주인공의 팬덤이 가장 작았는지 아직까지도 이해할 수 없다. 어쨌든 금발 벽안의 (어제 생일이었던) 그 남자 주인공을 생각하며 글도 쓰고, 덕톡(같은 대상을 좋아하며 하는 이야기)을 하려고 행사를 주최하기도 하고, 사진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때의 난 엄연한 투디 오타쿠였다. 심지어는 본토인 나라의 도시에서 콜라보 카페를 개최한다고 해서 오로지 그 카페에 다녀오기 위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기억나지 않는 중국어를 더듬더듬 복습하면서 말이다. 그렇다. 나의 첫 강렬한 덕질은 중국 장르였고, 어느 순간 스멀스멀 중국 정부의 입김이 스토리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계기로 경찰이 직업인 한 주인공이 공안 같은 소리를 공식 계정에서 했을 때, 내 마음도 파사삭 꺼져 버렸다(이정도로 말하면 아마 아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두 번째 강렬한 덕질은 지금도 좋아하고 있는 아이돌 그룹이다. 원래 좋아하던 걸그룹의 동생 그룹인데 소속사 합동 콘서트를 할 때 처음 봤다. 도대체 누가 큐시트를 짠 건지, 내가 좋아하는 그룹은 한 곡이 지나고 두 곡이 지나도 나오지 않고 이 남돌 무대만 주구장창 나오는 것이었다. 당연히 멤버들은 땀에 흠뻑 젖었고 나는 얘네 미성년자라 빨리 무대 끝내고 집에 보내야 하는 거냐고 농담을 했다. 그런데 듣다 보니 노래가 너무 좋았다. 누가 작곡한 곡이야, 하고 찾아보니 전부 내가 원래 좋아하던 작곡가의 곡이었다. 그런데 그 작곡가가 해당 그룹에 꽤나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떤 그룹이길래 이 작곡가가 이렇게 곡을 많이 써주었나 궁금했다. 찾아보다 보니 최근에 나온 노래가 끝내준다는 이야기가 보였다. 그 노래를 듣자마자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 곡이 'Beautiful Beautiful'이었다.


나는 우연히도 어제 또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짝꿍과 함께 LCK 결승전 직관을 보러 갔다. 나는 원래 롤을 하지도 않고 롤 경기를 보는 짝꿍을 옆에 두고도 시큰둥했었다. 그런데 직관의 분위기는 다르니까, 나는 어쩌면 결승을 보며 T1의 팬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었다. 당일에 경기를 볼 때 (당연하게도) 갑자기 경기를 보는 눈이 길러지거나, 누구의 무빙이 눈에 들어오거나 하진 않았다. 그런데 우리에게 가장 잘 보이는 화면에 한 선수의 표정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는 생글생글 잘만 웃는 선수라던데 긴장으로 굳은 표정이 자꾸 신경쓰였다. 하필이면 또 귀엽게 생겼다. 얼굴에 붙인 스티커는 그 귀여움을 배가시켰다. 그 선수의 사진, 영상, 관련 글을 자꾸 찾아보는 나를 보고 젠장, 또 홀랑 넘어가버렸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들 덕질은 현생을 잘 챙기기만 하면, 밸런스를 맞추면 좋은 일이라고 한다. 반은 동의한다. 덕질은 좋다. 그러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덕질을 참는다기보다는, 덕질이 오히려 나에게는 원동력이 된다. 2021년에 내가 석사 논문을 완성할 수 있는 원동력은 누가 뭐래도 앞서 언급한 아이돌 그룹이었다. 그 그룹이 컴백하는 날 온전히 즐기기 위해 그 전에 논문을 완성하려고 기를 쓰고 글을 썼다. 사랑에 빠지면 열정이 불타지만 그만큼 몸이 피곤하긴 하다. 그래도 나는 사랑에 쉽게 빠지는 내가 꽤나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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