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친해진 친구들에게 말하면 아무도 안 믿겠지만, 나는 어른이 되고도 한참 술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처음 본 사람들은 내가 술을 한 방울도 못 마실 것처럼 생겼다고 하는데, 이미지와 상반되게 주당이라는 사실이 친구들의 머리에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맥주의 맛을 알게 된 건 스물 세 살의 봄, 혼자만의 유럽 여행에서였다. 해외에서 혼술을 하니 정말 어른이 된 것 같다는 기분을 만끽하며 벨기에의 어느 바에서 스텔라 생맥주를 시켰는데, 정말 맛있는 생맥주에서는 갓 구운 빵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그때 알게 되었다.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유독 까다로워진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술자리에 대해 설명해보겠다. 먼저 사람은 두 명에서 네 명 사이여야 한다. 혼자 술을 마시면 외롭기도 하고 페이스 조절을 하기 어렵다. 다섯 명 이상의 술자리는 공통의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기 어렵다. 시간은 초저녁부터가 좋다. 나에게 술을 마신다는 건 곧 하루의 종결을 의미하기 때문에, 낮에 술을 마시면 하루가 너무 빨리 끝나버린다. 나머지 시간은 무기력하게 죽이게 되는 기분이 별로다. 그런 의미에서 할일이 조금은 있는 날, 저녁에 술을 마시겠다는 동력으로 할일을 더 열심히 끝내는 기분이 좋다. 밥과 술은 같이 시작해야 한다. 밥을 따로 먹고 술을 마시면 배도 부를 뿐더러 술 생각에 밥의 맛을 느끼는둥 마는둥 하게 된다. 안주는 술과 잘 어울리면 좋겠지만 더 중요한 조건은 소금기이다. 나는 달콤한 안주를 잘 못 먹기 때문이다. 어쨌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열두 시나 한 시까지 홀짝대다 다음날 일정 없이 잠드는 밤이 가장 좋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술과 안주는 화이트 와인에 라자냐이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친구가 떠나고 거의 6개월 동안 매일 술을 마셨다. 맥주 한 캔이라도 마셔야 잠들 수 있었다. 그때의 나는 분명 알코올 의존성이 높은 상태였으나 상황이 특수해서 스스로 봐주기로 했다. 언제든 벗어날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결국 마음이 구렁텅이에서 나오면서 더이상 매일 술을 마시지는 않는다. 지금은 술을 마시는 빈도에 대한 큰 원칙이 있다. 나는 일주일에 서너 번 고강도 운동을 하는데, 매주 고강도 운동을 하는 횟수보다 술을 마시는 횟수가 적을 것, 그것이 나의 원칙이다.
원칙은 원칙일 뿐, 오늘은 너무나도 취하기 좋은 날이다 하면 원칙을 깨고 술을 더 마시기도 한다. 축하할 일이 있을 때, 반대로 너무 힘든 일이 있어서 오늘 하루를 강제 종료하고 싶을 때는 취하기 좋은 날이다. 하지만 역시 기분이 나빠서 마시는 술보다는 기분이 좋아서 마시는 술이 훨씬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