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글] 46_ 건반 위의 서툰 춤

by 벼르

초등학교 때는 피아노 학원을 한 번 빠졌다가 다시는 못 가게 되어버린 경험이 있다. 넉넉한 형편도 아닌데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미짱은 단 한번의 땡땡이에 가차없이 학원을 관두게 했었다. 그렇지만 피아노가 싫었던 건 아니다. 사실 부모님 초청 장기자랑인 연말 연주회에서, 원하는 곡을 연주하지 못해서 잠시 삐딱해져 있었을 뿐이다. 나는 부르크뮐러의 <이별>이라는 곡에 흠뻑 빠져 있었는데, 선생님은 그 곡이 어린이답지 않다면서 연주회에서 그 곡을 연주하지 못하게 했다. 대체 어린이다운 게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 후의 피아노와의 관계는 늘 짝사랑이었다. 피아노를 치는 일은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가끔은 잘 연주하는 걸 시도하면서도 마음같지 않았다. 성당에서 울면서 반주하고, 공연곡을 연주하기 위해 불을 꺼놓고 연습하면서도 피아노가 싫어지지는 않았다. 무서워졌을 뿐이다.


그러다 작년에 <음악실기지도>라는 과목을 수강하면서 다시 필연적으로 피아노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일단 있는 힘껏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 과목은 전공 필수과목이었고, 내가 돈을 벌어 내 등록금을 충당하는 형편이었음에도 피아노 학원에 등록했다. 성인이 되어 다니는 피아노 학원은 유년기와 같고도 달랐다. 열 번 쳐오라는 숙제 앞에서 치기 싫어서 몸이 뒤틀리는 건 어릴 때와 같았고, 그 결과로 학원비가 아까워서 괴로워하는 건 숙제를 안 한 당사자인 나라는 사실은 달랐다.


결국 시험 2주 전, 벼락치기로 무지성 연습을 시작했다. 다른 과목과 다를 바 없었다. 피아노가 다른 과목과 다른 유일한 점은 몰래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전자피아노로 이어폰을 끼고 연습하다가도, 결국엔 다이나믹(음량)을 살리기 위해 이어폰을 빼고 연습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동아리 친구(H)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 친구가 동아리 방에서 공부하는 동안 열연습을 했다. 계속 똑같은 곡을 들으려니까 지겹지, 하고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웬걸, 그 친구는 매번 연주가 달라져서 괜찮다는 말을 했다. 당연히 연주를 잘 할수록 매번 나오는 퀄리티는 균등하다. 사실상 그 친구의 말은, 내가 매번 다른 지점에서 실수를 저질러 웃기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그 말에 자극받아 오기가 생긴 나는 이를 악물고 연습했다. H는 연주에서 어금니를 악문 느낌이 난다면서 웃었다. 실제로 턱이 아플만큼 이를 물고 틀리면 안 된다는 강박으로 연주했기에 할 말이 없었다. 허탈해서 그냥 웃었다.


그래서 그 실기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얻었냐 하면 당연히 아니다. 2주 빡세게 연습한 결과로 좋은 성과를 거둘 사람이면 이미 피아노로 뭐라도 했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피아노를 짝사랑한단 감정은 덜했을 것이다. 나는 수백 번이 넘게 하나의 곡을 반복해 연습했는데 시험 이후 들은 커멘트라고는, 알레그로는 좀 더 빨리 치라는 한 마디뿐이었다.


피아노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했다거나 하는 극적인 이야기가 아니어서 아쉽다. 그래도 적어도, <악흥의 순간> 4번을 어거지로 쳐낸 이후로 피아노 앞에 앉는 걸 덜 망설이게 되었다. 교수님의 피드백은 요만큼 야속했지만, 그리고 피아노가 그닥 내 말을 잘 들어주진 않지만, 사실 세상 일이 다 그렇다는

생각도 든다. 적어도 정말 내 분야가 아니구나 싶다가도 연습하는 만큼 꾸준히 느는 측면에서 피아노를 이길 대상이 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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