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글] 55_ 나는 이별 앞에서 떼쟁이가 된다

by 벼르

예기치 못한 이별 앞에서는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어릴 때부터 나는 이별을 싫어하고 두려워했다. 모든 이별은 별로였지만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미국에 갔다가 홈스테이 호스트 가족과 헤어지는 일은 당연히 힘들었다. 하지만 어차피 처음부터 두 달의 인연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가장 좋아했던 5학년 담임선생님과의 이별은 잔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매 학년 담임선생님과 이별하고 새로운 선생님을 만난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납득하게는 되었다. 문제는 영원할 것이라 여겼던 사랑이 단숨에 죽어버렸을 때다. 이런 이별에 내성이 생기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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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왜 분노의 5단계라고 알려졌는지 모를 이 유명한 5단계는 사실 grief의 5단계이다. grief는 큰 슬픔을 말하는데 특히 누군가의 죽음에 의한 슬픔을 말한다. 나는 연인과의 이별이 사실 상대방의 죽음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헤어지고 나면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어지기 때문이다. 친구와 멀어지는 일과는 약간 다르다. 독점적이던 관계가 일시에 해제되고 가장 많이 연락하던 사람과 일시에 연락을 줄여야 한다. 그래서인지 내가 이 5단계를 처음으로 강렬하게 경험한 건 첫사랑과의 이별이었다.


다섯 단계 중에서 첫 단계인 부정은 나를,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을 당황하게 한다. 뻔히 사실인 걸 아니라고 하고 다니게 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첫사랑이랑 헤어졌을 때 헤어진 게 아니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냥 잠시 싸웠는데 걔가, 못할 말을 한 거야. 금방 다시 만날 건데 뭐. 그냥 잠깐 그런 거야. 걱정하지 마! 며칠간 울어서 눈은 탱탱 부은 채로, 먹지도 못해서 수척해져서는 그런 소리를 하면 남들이 잘도 믿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부정에 정신 차리라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다들 나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얼마 안 있어 정신을 차릴 것임을 알고 있었나보다.


경험적으로 유아들은 떼를 쓸 때 '싫어'보다도 '아니야'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이를테면 이제 놀기로 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더 적절한 반응은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가다니 아쉬워요' 또는 '약속한 시간만큼만 놀아야 하다니 속상해요'겠지만, 어린 아이들은 일단 '아니야'라고 하고 본다. 마치 아니라고 말하면 시간이 되돌아가기나 할 것처럼. 어른인 우리 입장에서는 뭐가 아니야, 하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우리도 감당할 수 없는 사건 앞에서 어린애가 되지 않는가.


사실 오늘은 이 글을 바치고 싶은 친구가 있다. 친구는 얼마 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냈는데, 며칠간 죽은 사람처럼 지내다가 오늘 갑자기 말짱해졌다. 그냥 살아있다고 생각하기로 했어, 라는 말에 말문이 막혀 그렇구나 라고 하고 말았다. 직접 말하진 못하겠지만, 마음껏 떼쓰라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다. 사랑했던 만큼 우리는 악다구니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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