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작품에 클리셰라는 말을 쓸 때 대부분 긍정적인 뉘앙스는 아니다. 클리셰는 진부함의 상징이다. 어떤 영화나 드라마가 클리셰 범벅이라고 하면 보고 싶던 마음도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클리셰가 언제나 나쁜 것만은 아니다. 가끔은 산해진미보다도 라면이 당길 때가 있는 법이다. 익숙하고 아는 맛이 더 무서우니까, 클리셰는 가끔 만나면 즐겁고 반갑다.
물론 그 반가움은 좋아하는 장르에 해당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서 나는 아침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아서, 아침 드라마의 클리셰를 잘 알지도 못한다. 아마 클리셰적 연출이 나와도 나는 알아채지도 못할 것이며, 특유의 반가움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나에게 반가움으로 다가오는 클리셰의 전형적인 장르는 미국의 하이틴 영화다. 여자 주인공은 공부를 잘 하고, 남자 주인공은 미식축구부나 농구부의 주장일 것.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을 무시하다가 자꾸만 눈에 밟힐 것. 악역처럼 등장하는 얄미운 조연은 꼭 치어리더이고, 두 주인공의 부모님 중 한 쪽이 꼭 상대방을 미워해야 하며, 여자 주인공은 종종 불치병에 걸린다. 그리고 늘 등장하는 소재인 프롬 파티, 집이 비는 날에는 홈 파티, 갈등은 늘 사물함 앞에서 벌어지며, 수업도 제대로 안 들으면서 이름을 들으면 알 법한 대학에 지원서를 낸다(진짜 재밌게 산다). 가끔 머리를 비우고 싶을 때 하이틴 영화를 본다. 그러면 친숙한 문법으로 비벼진 달콤한 이야기가 나를 반긴다.
클리셰가 정말 싫고 진부하게 느껴질 때를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클리셰가 아닌척할 때가 제법 열받는 것 같다. 무슨 대단한 요리인 양 내어 놓았는데 라면이면 기분이 안 좋은 것처럼 말이다. 20만원짜리 오마카세에서 메인으로 라면이 나오면 열받지 않겠는가?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굉장히 신박한 것처럼 이야기를 전개해 놓고 실상은 클리셰 범벅일 때 가장 김이 빠지는 것 같다. 그리고 즐거운 클리셰라고 해도 클리셰'만' 있으면 안 된다. 포인트가 되는 신박한 요소나, 잘 쓴 대사, 하다못해 얼굴이라도 하나 새롭게 재미있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 라면도 라면'만' 먹기보다는 달걀이라도, 치즈라도, 대파라도 얹어 먹으면 훨씬 풍미가 사는 것처럼.
매일 먹을 수는 없어도, 가끔은 라면을 먹어줘야 하는 법이다. 최근에도 나는 <하이스쿨 뮤지컬>로 클리셰를 수혈했다. 아직은 아니지만, 조만간 또 클리셰가 당기는 날이 오면 <프린세스 다이어리>를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