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글] 75_ 기억에 남는 선생님

by 벼르

왜 이런 주제에는 안 좋은 쪽이 먼저 떠오를까? 좋은 선생님들은 늘 은은히 좋았다. 성인이 되어서도 좋은 쪽으로 기억에 남을 만큼의 임팩트가 있는 교사라면 드라마틱한 사건이 있었어야 한다. 학교를 다룬 흔한 영화들처럼 말이다. 좋은 교사를 다룬 영화의 클리셰는 대충 이렇다. 문제투성이인 학급에 신규 교사가 부임한다. 학생들과 갈등을 겪는다. 라포를 쌓아보려 하지만 마음 같지 않다. 그러다 어떤 사건이 생긴다. 선생님이 다친다거나 학교와 선생님이 싸운다거나 아무튼 선생님이 크게 곤경에 처하는 일을 겪고 아이들이 선생님을 보호한다. 그 뒤로는 구제불능이라 여겨지던 학생들과 교사의 끝내주는 팀웍이 시작된다. 그들은 함께 전설적인 무대를 꾸미거나 성적을 드라마틱하게 올린다. 결국 교장선생님도 교사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고, 아이들의 인생은 이전과 180도 달라진다. 이런 일이 나에게 있을 수가 없던 이유 세 가지. 첫째, 애초에 내가 속한 학급이 그정도의 문제 학급이던 적이 없다. 둘째, 대부분 교사는 스스로 그저 월급쟁이라고 생각한다. 셋째, 한국에서 혁신적인 걸 하려 하면 주변의 질타를 받아서, 있던 사명도 사라진다.


아무튼 내가 크던 때는 체벌이 허락되는 시대였던 데다가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았어서 갖가지 학대를 경험했다. 그중에서도 뜬금없이 학원 선생님이 유독 기억에 남는데, 특목고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함께해야 하는 선생님이었다. 이 글에서는 M 선생님이라고 부르겠다. M 선생님은 J 학원의 전설적인 존재였다. 이미 원하는 학교에 수많은 학생을 보낸 전적이 있었고 선생님은 오직 중3만 가르쳤다. 우리는 선생님의 명성만 들으며 중학교 1학년, 2학년을 보냈다. 중학교 3학년 때 비로소 M 선생님의 반에 들어갔는데, 그 한 해를 요약하자면 텝스 점수가 670점에서 930점으로 올랐고 나는 원하던 외고에 합격했다.


"진짜 진짜 무섭고 숙제도 개많대. 근데 반드시 원하는 학교에 갈 수 있대."

소문은 사실이었다. 숙제는 한 번 갈 때마다 12~14개씩 부여되었다. 마지막 항목은 늘 단어 암기였는데 매번 250개의 단어를 외워야 했다. 나머지 숙제 하나하나도 만만치 않은 숙제였고 한 항목을 해결하려면 한두 시간이 걸렸다. '교재 88쪽~125쪽 읽어 오기'같은 숙제는 몰래 건너뛰어도 되지 않나 싶겠지만 수업시간이 대충 이렇다. "한별. 93쪽의 세 번째 줄 문장 무슨 뜻이야." 대답을 못 하거나 버벅거리면 그날은 아웃이었다. 그렇다고 학원에서 쫓겨나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날은 선생님이 더이상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투명인간인 채로, 숙제를 제대로 안 한 걸 후회하면서 세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렇게 월수금을 보냈다. 당연히 화목토는 하루종일 숙제에 매달렸다. 숙제를 제대로 안 하느니 학원에 아예 결석하는 게 나았다. 같이 학원에 다니던 KK와 울면서 집에 돌아가던 날도 자주 있었다.


여기까지만 쓰면 그냥 빡센 선생님 같지만, 문제는 우리가 선생님을 너무 사랑했다는 것이다. 선생님이 그렇게 만들었다. 선생님은 꿈을 계속 불어넣었다. 'inspire'하는 법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었다. 언변은 대단했고 채찍은 매서웠으나 당근은 그렇게 달콤할 수 없었다. 선생님은 밀당도 할 줄 알았고 엄한 만큼 다정할 때는 한없는 감동을 줬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아주 불건강한 연애처럼 느껴진다면 좀 이상한 걸까.


예비 교사의 길을 걷고있는 지금, 스승의날인 오늘은 우연히도 나의 첫 교생실습 날이었다. 이런 유의미한 날에 나는 다른 건 몰라도 학생을 조종하는 교사만은 되지 않으리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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