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글] 93_ 하얀 종이 위에다

by 벼르

언제부터 그림이 이렇게 무서워졌을까? 어릴 땐 거침없이 종이 위에 선을 긋고, 만화를 그려 친구들에게 공유하고, 심지어는 화가가 되겠다고 말하고 다니던 시절도 있었는데 말이다. 아마 내면의 세상이 정교해지면서 머리가 손을 점점 답답해한 것 같다. 내 감각 기관은 세상의 아름다움과 거침과, 부드러움과 랜덤함을 점차 구체적으로 포착해낸 데에 비해 내 손은 그걸 구현하지 못했다. 정밀하게 세상을 반영하기에는 섬세하지 못하고 거침없이 변형해 추상화를 그릴 만큼 과감하지 못했던 내 손은 언제까지나 열두 살에 머무를 것만 같았다(딱 열두 살까지만 그림을 열심히 그렸기에 이렇게 표현한다).


언젠가부터 명확한 한계를 느꼈지만 난 어쨌든 6학년 때까지는 계속 그렸다. 내 만화를 계속 찾는 친구들도 있었고(물론 그림보다는 스토리 때문이었다), 내가 그림을 그려서 운영하는 게임도 있었다. 나는 친구들의 캐릭터를, 반려동물을, 의상과 액세서리를 그리고, 식품이나 아이템을 그려서 팔고, 은행을 그려서 게임 머니를 저축해주고, 동물병원을 그려서 아픈 동물들을 치료했다. 어쨌든 서툰 실력으로나마 뻔뻔하게 하나의 세계를 구축할 줄 알았다.


중학교가 되자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일이 확 줄었다. 달걀을 그리는 소묘 수업에서는 모두가 4B연필을 들고 명암을 묘사해야 했고 포스터 수업에서는 모두가 포스터칼라 물감을 들고 선을 넘어가지 않게 종이를 째려보면서 색칠하고 있었다. 점수가 잘 나오면 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구나 하다가 점수가 엉망이면 역시 난 그림을 못 그린다고, 자아상이 계속 바뀌었다. 점수와 상관없이 늘 즐거웠던 음악 수업과는 달리, 미술에 대한 자신감은 들쭉날쭉했다. 나는 그림 그리기가 무서워졌다. 그림은 늘 평가와 직결되었다.


마음대로 그리는 그림이란 얼마나 소중한가. 성인이 되어서 마음대로 낙서할 일이 몇 번 있었는데, 그래서 이제 흰 종이에 펜으로 그리는 선화는 무섭지는 않다. 그래도 이왕 그림 그리기에 대한 글을 쓰니 내 그림의 장점을 떠올려본다. 내 그림은 귀엽다. 조금 삐뚤지만 뭔지 알아볼 수는 있는 그림이다. 사람보단 동물을 잘 그린다. 특히 온갖 종류의 강아지를, 가장 간단한 선으로 그려낸다. 소미와 나루라는 자체 캐릭터도 있다. 둘 다 그리는 데 10획도 필요하지 않은 디자인이다. 언젠가 소미랜드의 캐릭터들의 지금의 친구들에게도 소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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