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글] 104_ 질리지 않는 것

by 벼르

1. 한밤 중의 수다

왜 밀담은 밤에 나누어야 더 재미있을까? 편의점 플라스틱 의자에 앉으면 밤을 뚝딱 샐 수 있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술 때문만은 아닌 것이, 고등학교 때도 야자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나누는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었다. 부자녀캠프(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있던 전통으로, 아빠들이랑 아이들이 캠프를 가는 행사이다)에서 처음으로 수다를 떨다 밤을 샌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다음 날 헤롱거릴 걸 알면서도, 분명 잠이 모자란 상태인데도, 밤이 깊을 수록 초롱해지는 눈. 야밤의 수다는 질릴 수가 없다.


2. 낯선 곳으로의 여행

이상하다. 누군가는 여행은 몇 군데 다녀보니 다 거기서 거기라는데, 나는 갔던 곳을 또 가도 좋다. 내가 바르셀로나를 열 번 방문한다 해도 다 알수 있을 리 없다. 당연하다. 서울에 평생 살아도 서울 맛집은 새롭고 새로우니까. 하지만 서울에선 새로운 일을 하겠다는 다짐이 잘 안 된다. 날마다 새로운 일을 하겠다고, 새로운 장소에 방문하겠다고 다짐하게 되는 일은 하나도 안 질린다.


3. 사람과 친해지는 일

새로운 사람이 아니다. 원래 있던 사람과 한 단계 더 친해지는 일은 늘 짜릿하다. 1번의 새벽 밀담 때문일 수도 있고 2번의 여행을 함께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신기하게도 충분히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과 더 친해지는 일이 언제든 가능하다. 어쩌면 하강 곡선을 그릴 때가 있어서 상승감이 끝없이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강 곡선을 잘 느껴지지 않고 상승 곡선은 그렇게나 뿌듯하고 벅차다.


4. 순간에 빠져드는 일

바로 이전 글의 합창을 할 때 자주 느껴지는 감정이다. 다른 모든 것을 잊고 딱 그 순간에만 집중하는 일이 흔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서 더 귀하다. 달리기를 하다가도 러너스 하이를 만나면 귀찮음을 무릅쓰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사실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다. 그 순간 느끼는 감정으로 꽉 차서 다른 잡생각이 안드는 경험이야말로 귀하고도 더 살아갈 이유이다.


5. 창작하는 일

마음먹기까지가 어렵지만 그만큼 질리지는 않는다. 무언가를 쓰고, 만들고, 결과물을 차곡차곡 쌓아가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만치 가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저만치'가 실력적으로 나아진다거나 이전보다 발전한 사람이 된다는 보장이 되어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역시 멈춰서 표류하는 것보다는 어딘가로 걷고 있는 동사 상태의 내가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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