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황혼

사계절의 가을과 일생의 가을

by 히비지비

어느 가을 오후

그는 공원 벤치에 앉아있다

푸드덕이며 날아오르는 새떼 소리

그 날갯짓에 빙그르 떨어지는 낙엽의 고요

미지근한 햇살 아래

그렇게 한참을 앉아있다


눈썹 아래까지 눌러 쓴 모자

지문투성이 뿔테 안경

어제도 입었을 법한 체크 남방

풀밭 갈대처럼 살짝 구부정한 자세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밋밋한 표정

그는 가을이 어색하다


한때 그는 골목대장 노릇을 하며

무리를 진두지휘하며 뛰어다녔고

얌전히 걷는 법을 몰랐다

저녁밥을 마시듯 먹고 나가면

온 가족이 동네를 샅샅이 뒤지기 전까지는

시간 가는줄 모르고 흙먼지를 굴렀다


한때 그는 짝사랑하던 여학생에게

용기내어 고백했다 퇴짜를 맞고

밤새 소주를 들이켰다

그 뒤로도 몇 년을 쫓아다녀

그녀의 마음을 겨우 얻어냈다

밑창이 닳도록 사업장을 떠돌았고

해가 지면 소주로 목을 축였다


여전히 그는 해 뜨기 무섭게 일어난다

아내가 차려준 숭늉 한 그릇

호호 불어가며 남김없이 먹고나면

안방 옷장에서 모자를 꺼내어 쓰고

뒷짐 진 채 집앞 공원으로 걸어간다


이제 그의 머리 뒤로 해가 넘어간다

그는 공기의 침묵을 깨고

한 손을 짚은 채 벤치에서 일어난다

그렇게 한참을 서있다가

추워지기 전에 들어오라는 아내가 떠올라

아쉬운 발걸음을 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