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발현의 기승전결

아사다 마오의 은퇴식 미소

by 방석천

어제 그녀의 웃음은 그동안 빙상 경기에서 보여주던 모나리자 미소와는 다른 환하고 밝은 미소였다. 아사다는 곱단정하게, 흰색 상의와 까만 치마를 입고 은퇴식장을 들어오는데, 그 담백한 차림며 질문에 대답할 때마다 반가운 웃음으로 답하는 자세 등은 잘 익은 일본의 미가 느껴지는 듯하다. 이 동영상을 보며, 비록 김연아의 그늘에서 큰 빛을 보 못했음에도, 그녀의 은퇴 회견에서 느낄 수 있었던 아름다움은 그녀의 각고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나에게 문뜩 자책의 마음을 떠올리게 한다. ‘노력이 아름다운 것이구나'. 노력이 바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나는 지금 글쓰기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전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노력을 아끼려 하는가? 노력을 옆으로 밀어 놓으며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


아사다의 미는 ‘타자의 욕망'(라깡의)에 대한 세밀한 관찰에서 오는 게 아닐까? 일본의 미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세밀함의 미. 반면 우리는 거칠음을 자연적 미, 소박함의 미로 생각하고 평가하곤 한다. 이러한 거칠음은 한편으로는 타자의 욕망에 대한 거칠음, 무시 내지 거부로 나타나는 면이 있는 듯 하다. 라깡의 분석에 반하는 방향이다. 일종의 반항이랄까? 우리 타자의 욕망을 거부하고 일본미는 이에 순응하는 듯 그러나 세밀함 속에 감추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면 우리의 유행병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이는 바로 라깡의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기(타욕욕=타2욕; 발음이 편한 타2욕을 이글에서는 사용)가 아닌가? 그러나 이는 자존심 상하는 말이다. 그래서 각기 문화마다 이를 한번 비트는 모션을 보이는 것 같다. 내가 오늘 본 아사다의 미는 보이지 않게, 가리어진 타2욕임에 반해 우리 유행병은 눈에 보이는 타2욕으로 보인다.


그러면 서구인은 어떤가? 작년 조선일보 영국인 철학자 팀 알퍼의 칼럼("유행대로 한국인 내멋대로 영국인")에서도 잘 묘사되었듯이 그들은 유행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한다. 눈에 보이는 타2욕을 거부한다. 그러면 개성 발현을 타2욕 거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라깡은 개성적 사고의 본산인 프랑스 사람이다. 그는 서구인의 개성 문화에 내재하는 타2욕을 말하고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요즈음 개성의 정치인 트럼프를 어떻게 라깡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가? 그는 정치인이고 물론 타2욕의 존재이다.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이를 성취하는 방법 스타일이 다를 뿐이다. 즉 개성을 발현시킴으로써 타2욕을 이루고 있다. 문화의 차이이다. 우리는 거부하고 일본은 감추고 서구는 개성을 발현시키면서. 개성을 발현시키는 문화의 흐름에서 본다면 우리는 아직 초등학생의 문화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나 생각한다. 흑백 논리와 이념에 매몰되고 있는 우리를 돌아볼 때 개성 발현의 단계에서 기승전결의 기 정도에 머무르고 있는 게 아닐까? 일본이 승, 서구의 전 그리고 결이 아닐까?


생명이 지금처럼 진화한 것은 무한한 자유도(또는 다양성) 때문이다. 위의 표지 그림에서 보듯 런던 광장의 사람들은 도꾜 거리의 흑백의 제복을 입은 듯한 군상에 비해 얼마나 다양한가? 개성의 문화는 다양성의 문화이다. 그러므로 개성 발현의 문화는 인류의 진화를 위해서도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도 문화가 나아가는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문화도 개성을 좀 더 발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다. 그러면 무엇이 개성의 발현일까? 개성의 발현이 후회없는 행복의 길 아닐까? 인류라는 엄청난 유산을 갖고 태어난 우리가 이를 잘 활용하지 못한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이를 그대로 사장시키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아사다의 은퇴를 보며 다시금 노력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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