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것과 하얀 것에 대해 쓰다 (2)

한국인의 국어생활 22

by 집우주

앞선 글에서 다뤘듯 한강 작가는 자신의 책 <흰>에서 '하얀'과 '흰'을 구분하고 있다. 두 단어의 기본형은 '희다'와 '하얗다'인데 그가 하나의 글에서 이 둘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원래 흰색이었을 그 방의 철문은 시간과 함께 색이 바래 있었다. (중략)

짐을 정리한 다음날 페인트 한 통과 큼직한 평붓을 샀다. (중략)

연회색 트레이닝복에 낡은 스웨터를 걸치고 칠을 시작했다. (중략)

얼룩이 지더라도, 얼룩이 더러운 얼룩보단 낫겠지. (중략)

한때 비가 새어 생겼을 천장의 커다란 얼룩을 하얗게 칠해 없애버렸다.

연갈색 싱크대 안쪽의 더러운 부분도 물수건으로 한번 닦고는 새하얗게 칠해버렸다.


흰색, 흰 페인트, 흰 스웨터, 흰 얼룩에서 '희다'가 보인다. 여기에 쓰인 흰을 하얀으로 바꾸어도 문법적으로 틀리거나 문제가 될 것은 없다. 다만 작가가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 있다"고 했으니 명사들 앞에 하얀이 아닌 흰이 놓인 데에는 분명히 의도가 담겨 있을 것이다. '하얗다'는 동사를 수식하는 부사 형태인 ‘하얗게‘로 쓰였다. 그런데 이것을 '희게'로 바꾸면 어색해진다. 시(詩)라면 허용될 수도 있는 표현이지만 산문인 이 글에서는 '칠하다'와 호응을 이루지 못한다. 작가는 색, 페인트, 스웨터, 얼룩 앞에서는 희다와 하얗다 중에서 어느 것을 놓을지 생각했겠지만 어떻게 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잠시도 고민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책에서 희다와 하얗다가 쓰인 부분을 좀 더 찾아보자.


① -(으)ㄴ

* 흰 ; 흰 개, 흰 베갯잇, 흰 새, 흰 꽃, 흰 종이, 흰 조약돌, 흰나비, 흰 쌀, 흰 천, 흰옷, 모든 흰 것들

* 하얀 ; 하얀 강보, 하얀 털

② -게

* 희게 ; 아무리 희게 빛나도

* 하얗게 ; 하얗게 웃는다, 불빛들은 하얗게 얼어 붙어 있을 것이다, 머리가 하얗게 세다

③ -고 / -다

* 희고/희다 ; 촛농은 희고 뜨겁다, 파도는 눈부시게 희다, 달떡같이 희다, 속이 들여다보일 듯 희다

* 하얗고 ; 구름은 갑자기 하얗고 차갑게 빛난다


앞서 봤듯이, 두 단어가 ①의 어미(語尾) '-(으)ㄴ'과 결합한 형태인 '흰'과 '하얀'은 바꾸어 써도 무방하다. 다만 대부분의 단어 앞에 흰을 놓은 작가가 하얀을 붙인 강보와 털이 유독 눈에 띈다. ②에서는 문법적으로 둘을 바꾸는 게 자유롭지 못하다. '아무리 하얗게 빛나도'는 별 문제가 없어보이지만 '희게 웃다, 희게 얼어 붙다, 머리가 희게 세다'는 영 이상하다. 뜻이 묘하게 틀어지는 느낌도 들고, 발음과 소리도 뭔가 거슬린다. ③에서는 서술어로 쓰였으니 주어와의 호응을 따져봐야 할 것이다. 바꾸어 써도 괜찮은 것 같지만 단어에서 받는 느낌은 독자 개인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


이처럼 희다와 하얗다는 같은 색을 가리키지만, 문법과 감각의 차원에서 다르다는 것이 확인된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하나의 색을 단어 둘로 나누기 위해서 잠시, 한국어를 배우는 일본인이 되어보자. 한국어에서 희다/하얗다는 일본어 단어 白い[시로이]로 쓰면 되는데 이것을 한국어로 자연스럽게 바꾸려면 두 단어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일본어 검색 사이트에 누군가 이 둘의 차이를 물었고, 이런 답변이 달려 있었다.


* 희다: 자연적인 백색

* 하얗다: 인공적인 백색


나는 무릎을 탁 쳤다. '흰머리'는 노화나 스트레스로 인해 머리카락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어느 연예인이 배역이나 이미지를 위해 일부러 염색을 한 경우에는 '하얀 머리'라고 하지 않는가? 사람의 눈알에도, 닭이 낳은 달걀에도 '흰자'가 있다. 생명체는 자연이니, 한국인이 이를 '하얀자'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가 납득이 된다. '흰호랑이, 흰까치, 흰개미, 흰철쭉'뿐 아니라 '흰수염-, 흰점박이-'처럼 동물의 가죽, 피부, 털이나 식물의 꽃, 열매 등에서 보이는 특징적인 색을 이름에 넣을 때도 하얀이 아닌 흰이 쓰인다. 인간은 소에게서 얻은 '흰 우유'를 마시지, '하얀 우유'라고 하지 않는다. 여기까지 이해한다면, 백색을 띠는 딸기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하얀 딸기'는 품종의 돌연변이를 이용해서 인간이 인위적으로 색을 개량한 과일이다.


'희다는 자연, 하얗다는 인공'이라는 분류는 제법 잘 맞는 것 같다.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에게 이렇게 알려 준다면 그들의 오류나 실수를 크게 줄여 줄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왜 같은 색을 가리키는 단어가 두 개인지 궁금한 나 같은 한국인들에게도 꽤 명쾌한 답변이다. 하지만 나는 단어를 이렇게 칼로 무 자르듯이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언어는 칼로 물 베기에 가깝다는 것을 잘 안다. 이제 칼을 내려놓고, 다른 방법을 써봐야겠다.



** 참고 **

책. 한강 <흰>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흰 것과 하얀 것에 대해 쓰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