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것과 하얀 것에 대해 쓰다 (1)

한국인의 국어생활 21

by 집우주

몇 년 전 영어를 사용하는 외국인들에게 콩글리시(Konglish)를 들려 주고 뜻을 맞혀보라고 하는 내용의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당시에 이런 형식의 외국인 인터뷰 영상이 유행했던 것 같은데 나도 우연히 하나를 봤다가 "이것도 볼래? 이것도 있어."라는 유튜브 알고리듬의 소리없이 속삭임에 넘어가 연달아 여러 편을 보게 되었다. 한국인은 다 아는 영어 단어를 원어민이 잘 모르는 게 웃기기도 하고, 그들이 내놓는 답변이 엉뚱하고 또 기발하기도 해서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다.


브런치 <한국인의 국어생활>을 연재하게 되면서 언어와 관련된 이런저런 것들을 찾아보고 있다. 얼마 전에는 콩글리시를 검색했다가 오랜만에 위에 언급했던 류의 동영상 하나를 보게 되었다. 유튜브채널 '영국남자'의 <콩글리쉬를 처음 들어본 영국 선생님들의 반응?!'> 편으로 처음 보는 영상이었다. 출연자들은 에어컨, 리모컨, 셀카 등 간단한 영어 단어조차 몰랐다. 영어로 된 낯선 단어에 당황해하고 때로 충격을 받는 출연자들을 보면서 평생 영어를 듣고 말해 온 사람들이 맞는지, 다들 선생님이라고 하는데 이런 사람들에게 영어를 배우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농담입니다.) 이번에 영상을 보면서 내가 새삼 감탄하게 된 것은 외국인들조차 말이 된다고(make sense)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콩글리시의 위대함이었다. 남의 말을 가져와 자국화시키고 글자를 이리저리 붙여서 새 단어와 뜻을 만들어내는 한국인의 탁월한 조어 능력은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이라 자부할 만한다. 예전에는 콩글리시를 쓰는 게 부끄러운 것처럼 다뤄졌었는데 요즘은 그런 분위기도 많이 사라진 것 같다. 미국 방송인 타일러 라쉬(Tyler Rasch)도 한 인터뷰에서 '콩글리시도 한국어'라며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두 유 노 콩글리시?


아무튼, 내가 이번에 이야기하려는 것은 콩글리시가 아니다. 영상에서 문제로 출제된 것 중에 눈에 들어온 한 단어에서 이번 주제를 시작하게 되었다. 출제자는 '와이셔츠'를 아는지 물어봤고 대답을 못하는 출연자들에게 "카라깃이 있는 드레스 셔츠를 말해요. 약간 Y 모양이잖아요. (Like a collared dress shirt with that kind of Y Shape.)"라고 설명한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사실 나도 이렇게 알고 있었는데 셔츠의 칼라(collar) 모양만 본다면 V셔츠도 되지 않을까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어원을 알고 싶어서 사전에서 '와이셔츠'를 찾아봤더니, 충격! 놀랍게도 와이셔츠 옆 괄호 안에는 white shirt라고 써 있었다. 내가 그동안 Y로 알고 있었던 게 white였다니... 조금 더 찾아보니, 일본어로 ワイシャツ[와이샤쯔]라고 하는데 일본인이 white[와이트/화이트]를 ワイ[와이]로 적었다는 유래가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 글에는 알파벳을 써서 Y シャツ로 쓰기도 한다는 설명이 덧붙여 있었다.


와이(why) 와이(white)가 와이(Y)가 되었는지는 일본인에게 물어볼 일이고, 나는 우선 와이(white)에게 사과를 해야 했다. 그동안 와이셔츠가 티(T)셔츠처럼 알파벳을 쓰는 같은 부류로 잘못 알았기에 아래와 같이 다른 색깔을 입혀서 불러왔기 때문이다. 도대체 나는, 한국인은 와이(white)에게 무슨 일을 저질러온 것인지...


* 빨간, 파란, 노란, 까만, 분홍, 보라, 회, ... (+ 색) + 와이셔츠


미안하다. 이제나마 와이의 정체성을 알게 돼서 다행이다. 하지만 사과를 하고 나니 한편으로 그동안의 일을 너무 자책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사람 마음이란!) 한국인들은 이미 와이셔츠의 와이(white)를 색이 없는 바탕같은 개념으로, 마치 그림을 그릴 수도 있는 깨끗한 도화지의 색처럼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궁금해지는 것이 하나 생긴다. 한국인이 가장 많이 입는 색깔인 '와이(white)셔츠'를 한국어로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흰 셔츠'와 '하얀 셔츠' 중에서 뭐가 맞는 걸까? 둘 중에 아무 거나 써도 된다면 왜 우리말에는 '희다'와 '하얗다' 두 단어가 있는 걸까? 와이(white)를 어떻게 바꿔야 할지 몰라서 한참을 헤매고 있었는데 다행히 나보다 먼저 이것에 대해 고민한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가 쓴 문장을 가져와 봤다.


모국어에서 흰색을 말할 때, '하얀'과 '흰'이라는 두 형용사가 있다.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 있다.


-《흰》한강


음~ 솜사탕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배어 있다니... 갑자기 뒷덜미가 서늘해진다. 건드려서는 안 될 상자를 열어 버린 느낌이 이랬을까? 나는 그저 와이의 우리말이 뭐가 좋을지 궁금했을 뿐인데.



** 참고 **

책. 한강 <흰>

유튜브. 영국남자 <콩글리쉬 처음 들어본 영국 선생님들의 반응?!>

https://www.youtube.com/watch?v=C2bi_q72T5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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