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국어생활 20
정확한 숫자로 내어놓을 수 없지만, 나는 한국인의 언어생활에서 '호랑이'가 '범'보다 훨씬 더 많이 쓰일 거라고 확신한다. 한국인은 자연다큐멘터리에서 호랑이를 보지, 범을 봤다고 말하지 않는다. 동물원에 온 아이가 "와! 범이다!"라고 하는 건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도저히 그려지지 않는 장면이다. 역시 한국인에게는 호랑이가 더 가깝고 편하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호랑이(虎狼이)는 한자어고, 범이 순우리말이다. 그런데 정확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만 왠지 내게는 호랑이가 더 고유의 우리말처럼 들린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많은 한국인들이 이렇게 느낄 것이다.
내일(來日)은 한자어다. '어제-오늘-내일'에서 내일만 한자어다. 시간은 인간 활동에 가장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고, 그중에서도 태양의 위치를 따라 한 번의 낮과 밤을 묶어낸 날을 가리키는 단어는 인간에게 상당한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런데 왜 한국어에서 이렇게 중요한 단어 중 하나가 한자어일까? 오래 전부터 언어학자들이, 또 여기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답을 구해왔다. 그 연구 내용과 주장을 살펴보기 전에 내 의견부터 말하면, 내가 볼 때 내일은 호랑이와 무척 닮았다. 내일은 한자어지만 발음과 소리가 부드럽고 밝아서 그런지 순우리말 같다. 이 또한 나만 이렇게 느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는 이 지점(착각)이 매우 중요하다. 한국인에게 내일이 편하고 좋은 이유를 하나 더 들자면, 오늘과 굉장히 잘 어울린다는 데 있다. 둘은 글자 모양과 소리가 정말 닮았다. 둘 다 ㄴ,ㄹ,ㅇ의 울림소리를 하나씩 가지고 있고, ㄹ받침으로 끝맺는다. 심지어 두 단어를 붙여서 쓴 '오늘내일'이 사전에 한 단어로 등재되어 있을 정도이니 궁합을 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둘의 특징적인 차이는 모음(母音)에 있다. 가로로 놓인 'ㅗ, ㅡ'와 세로로 선 'ㅐ, ㅣ'의 수평-수직 구성은 시각의 글멋과 청각의 말맛을 살려내는 요소다. 마치 옛날 텔레비전 다이얼 스위치처럼 모음을 잡고 오른쪽으로 90도 돌려서 채널 오늘을 내일로 바꾸는 상상도 해 본다.
이제 순우리말에서 '내일'에 해당하는 단어를 알아보자. 12세기에 고려를 다녀간 송(宋)나라의 손목은 당시 고려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 발음을 소리나는 대로 적은 <鷄林類事(계림유사)>를 편찬한다. 이 책에 '明日曰轄載(명일왈할재)'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이는 "明日(명일)을 轄載(할재)라고 말한다."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잠깐, 내일에 해당하는 단어의 한·중·일 한자 표기를 살펴보자.
{한국어} 來日(내일)
{중국어} 明天(명천)
{일본어} 明日(명일)
明日(명일)은 일본어에서 내일을 뜻하는 단어로, あした[아시타]로 쓰고 읽는다. 한국어에서도 종종 '작일-금일-명일(어제-오늘-내일에 해당한다.)의 짝으로 옛날 문어체나 군대에서 사용되는 걸 볼 수 있다. 중국에서도 예전에는 내일을 明日로 썼었는데 현대에 이르러 明天[míngtiān 밍티엔]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아마 처음에 중국에서 만든 단어를 한국과 일본에서 가져와 썼을 것이다. 轄載는 소리를 그대로 적은 것이니 내일의 순우리말은 '할재/할제'라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내일에 해당하는 단어가 표기된 유일한 문구여서 근거가 부족해 추정할 뿐이라고 한다. 사전을 찾아보면 이외에도 '올제', '하제', '후제' 등의 순우리말을 찾을 수 있다고 나온다. 몇몇 학자들은 '올제'에 손을 들어준다. 올봄, 올가을, 올설 등에 있는 '올'이라고 하니 이해가 된다. 또 어느 학자는 6세기 경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아스카(あすか/飛鳥)문화에서 힌트를 얻는다. あす[아스]에 내일이라는 뜻이 있는데 飛鳥(비조)를 우리식 한자로 풀면 '날 비', '새 조'이니 내일에 해당하는 순우리말은 '날새'였다는 것이다.
할재든 올제든 날새든 어쨌든 이들은 내일에 자리를 뺏기고 사라지고 말았다. 내가 한·중·일 삼국의 한자 표기에서 보는 중요한 지점은 내일이 한자어이지만 중국이나 일본에서 쓰는 글자를 그대로 가져오지 않았다는 데 있다. 만약 그랬다면 단어에 來(래)가 아닌 明(명)이 쓰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일은 한국인이 한자를 사용해서 만들어낸 단어가 아닐까? 누군가 한자의 뜻을 살려 내일을 만들었고, 그것이 쉽고 편해서 널리 퍼져서 쓰이게 되었다. 실제로 발음해 봐도 할재, 올제, 날새보다는 확실히 내일이 편하고, '오늘의 짝'으로도 내일만한 게 없어 보인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뫼가 산(山)이 되고, 가람이 강(江)이 되고, 새·하늬·마·높이 동·서·남·북(東西南北)에 밀려난 것과 같이 한자어가 순우리말을 대체해 온 것과는 결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굳이 비교하면 내일은 한국인이 글자를 조합해 만들어내는 신조어나 콩글리시와 다르지 않다. cellphone(셀폰), mobile phone(모바일폰)보다는 역시 핸드폰(hand+phone) 아닌가? 쉬운 글자와 뜻으로 만들어진 단어는 사람들에게 널리 퍼질 확률이 높고, 그 단어가 특별히 문제될 소지가 없다면 세월이 흘러서도 오래오래 사용될 것이다.
한편에서는 '내일'이 원래 순우리말이라고 주장하는데 사투리의 '낼'에서 기원을 찾는다. 여기에 동의해 보면, 누군가 내일이라는 우리말을 그럴 듯하게 한자로 來日이라고 쓴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이 한자 生覺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우리는 아주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을 알 수 없을 뿐이다. 내일에 대한 여러 주장들이 있으니 나도 하나 더해 보면, 혹시 '이내'와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이내는 '해 질 무렵 멀리 보이는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으로 낮에서 밤으로 바뀌는 시간대를 일컫는 순우리말이다. 프랑스에서 개와 늑대의 시간(l’heure entre chien et loup)으로 말하는 낮도 밤도 아닌 경계의 시간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사전에는 이내의 옛말이 '연애'라고도 나와있다. 이내와 연애에 있는 소리 [내]는 내일의 '내' 자와 같다. 낮과 밤이 바뀌는 시간이 이내(연애)이니, 밤에서 낮으로 바뀌는 순간에도 [내]가 들어있지는 않을까? 모양과 소리가 닮은 글자를 들여다보고 소리내어도 보면서, 본 적도 없고 가 닿을 수도 없는 저 옛날을 마음대로 그려본다.
개화기 때, 한국인은 치즈(cheese)를 ‘소젖메주’, 토스트(toast)를 '군떡'으로 불렀다고 한다. 서양문물이 낯설었던 당시, 한국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지은 이름이었겠지만 -물론 지금 들어도 꽤 그럴듯하다- 오늘날 한국인이 이 단어를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 (쓰고 싶지 않을 것이다.) 호랑이에게 자리를 내어 준 범은 이날치 밴드의 <범 내려온다>는 노래 덕분에 그나마 어깨를 펴고 다닌다. 만약 이 노래가 없었다면, 또 다른 범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범은 얼마 후에 고어(古語)로 박제되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인은 치즈를 고르고, 토스트를 먹고, 범이 내려올 때만 빼고는 여전히 호랑이를 부른다. 시대에 따라, 사람들에 의해 단어는 만들어지고 사라진다. 순우리말이 아무리 좋고 훌륭해도 모든 단어를 고유의 우리말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핸드폰, 휴대폰, 휴대전화, 손전화, ... 한자어든 영어든 상관없이 얼마든지 섞어서 단어를 만들어 쓰면 된다. 내일의 순우리말을 찾으려는 노력은 의미가 있지만 그 단어가 사라졌다고 해서 아쉬워할 것도 없다. 우리의 입과 손 끝에서 살아가고 또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 바로, 단어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기 때문이다.
'내일'이 순우리말이 아닌 탓에 한동안 우리는 '모레, 글피, 그글피'가 있다며 위로해 왔다. 내일은 없지만 한국인은 더 먼 미래를 보는 사람들이라는 낙관과 희망의 메시지가 뒤따랐다. 나는 순우리말에 내일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순우리말에 내일이 없을 뿐, 우리말에는 분명히 내일이 있지 않은가? 이렇게 긴 내 글을 읽을 필요 없이 '한국인은 내일이 없는 민족'이라는 말에 영화 대사를 빌려 되받아쳐도 좋겠다. "그래, 우리는 오늘만 산다. 내일이 있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음... 말하고 보니, 협박할 것까지는 없는데... 아무튼, 한국어의 내일은 순우리말이 아니다. 쏘 왓?
** 참고 **
책. 이어령 <뜻으로 읽는 한국어 사전>
경향신문 <우리말에 ‘내일’이 없다>
https://m.khan.co.kr/opinion/khan-column/article/200408231817391#c2b
오마이뉴스 <정말 우리는 내일이 없는 민족일까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087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