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국어생활 23
흰색과 하얀색에 대응하는 한자는 백(白), 영어 단어는 화이트(white)다. 다른 언어에는 단어가 하나뿐인데 왜 한국어에서는 같은 색을 가리키는 단어가 두 개일까? 이 차이를 알아보려면 '희다'와 '하얗다'가 짝을 이루고 있는 우리말 단어를 살펴보는 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전에 아래 글을 보자.
어떤 의미에서 '흰'은 노랑이나 검정, 빨강이나 파랑 옆에 놓이는 색깔이 아니다.
노랑부터 파랑까지의 색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런 색들이 칠해질 수 있는, 아직 칠해지지 않은,
어떤 텅 비어 있음이 먼저 있어야 한다. 이를 테면 새하얀 캔버스와도 같은.
캔버스의 '흰'은 그러므로 노랑, 검정, 빨강, 파랑과 같은 여타의 색깔과 대등한 색이 아니다.
그것은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색이고 다른 모든 색들을 가능하게 하는 바탕색이다.
-《흰》해설, 권희철(문학평론가)
위 글은 한강 작가의 책 <흰>에 실린 해설이다. 평론가가 글을 읽고 문학적인 감상의 관점에서 쓴 글이겠지만, 문장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여 봐도 한국어의 단어 체계에서 '희다'는 빨강, 노랑, 파랑 옆에 놓이지 않는다.
① 희다 - 검다
② 하얗다 - 까맣다 - 빨갛다 - 노랗다 - 파랗다
①에서 보듯 희다는 검다와 짝을 이루고, 유채색과는 결을 달리 하고 있다. ②는 흔히 오방색으로도 불리는 다섯 가지 순우리말 색채어다. 둘뿐인 ①에 비해 ②는 갯수가 많은데, 이런 다양함은 여러 가능성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자연스러운 머리카락을 흰머리-검은머리로 부르고, 바둑에서 흰돌-검은돌을 두는 데에는 흑백이라는 둘 이외의 다른 색을 허용하지 않고, 대비를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
우선 희다의 짝인 '검다'를 들여다 보자. 천자문(千字文)을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더라도 누구나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天地玄黃)"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여기에서 '검다'에 해당하는 한자가 한국어에서 더 많이 쓰이는 黑(검을 흑)이 아닌 건 黑이 붓글씨에서 쓰이는 먹의 색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玄(검을 현)은 인간의 눈이 감각한 빛이 하나도 없는 어두운 상태를 색으로 표현한 글자다. 그래서 나는 黑은 색채어 '까맣다'와, 玄은 '검다'에 대응한다고 본다. 까맣다는 black, 검다는 deep dark라고 하는 설명이 더 쉽게 가닿을 것 같다. 동양학자들은 天玄을 '하늘은 검다'라고 색으로 해석하지 않고 '까마득하다, 멀어서 가물가물하다' 등으로 풀이한다. 어두운 밤하늘, 멀고 먼 우주는 빛이 없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검다가 빛과 관련한 표현이라면 그와 짝을 이루고 있는 '희다'는 자연스레 그 반대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희다의 어원인 '해다'(이하 밑줄 친 모음의 ㅏ는 '아래아'다.)만 찾아봐도 확실해진다. 여기에서 해는 태양이다. 인류가 불을 발견하기 전까지 빛을 내는 건 오직 해밖에 없었다. (별도 있지만 밤에만 볼 수 있고, 그 영향이 해에 비해 매우 적다. 사실은 해도 별인데 지구에 가까이 있어서 특별한 이름으로 불릴 뿐이다.) 맑은 날, 맨눈으로 해를 바라보면 바로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리게 된다. 그 찰나에 눈을 멀게 하는 강한 햇빛, 눈앞에 번쩍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눈부심, 그것을 색으로 감각한 단어가 희다일 것이다.
희다가 빛에서 나왔다는 것은 여러 단어에서도 증명된다. 색채어인 ②는 '하양, 까망, 빨강, 노랑, 파랑'처럼 어간에 받침 ㅇ(이응)을 붙여서 명사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희다는 힁, 희응 같은 이름이 없고, 언제나 '흰색'이다. 희다가 수식하는 형태인 '흰'으로 쓰이고 반드시 '색'이라는 글자가 필요한 건 희다가 빛이라는 걸 방증한다. (마찬가지로 검다도 같은 방식인 '검은색'으로 쓴다. 물론 '검정'도 있는데 나는 이것은 빛이 아닌 불과 관련한 단어로, 불이 탈 때 나오는 그을음의 색이라고 본다. "얼굴에 검정 묻었다"고 말하지 않는가?) 또다른 예를 들어보겠다. 검다는 빛이 하나도 없으니 '붉다, 누르다, 푸르다' 같은 빛이 묻어 나오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검붉다, 검누르다, 검푸르다'라는 단어가 만들어질 수 있다. 하지만 '희붉다, 희누르다, 희푸르다'는 없다. 빛의 삼원색인 RGB(Red + Green + Blue) 가산혼합 방식에서 흰색은 모든 빛을 더할 때 나오는 색이다. 그러니 희다에 다른 색깔의 빛이 섞일 수 없는 것이다. 앞선 글에서 본 '하얗게 칠하다'를 '희게 칠하다'로 바꾸면 어색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나는 여기에 있다고 본다.
나는 한자 白(흰 백)에서도 해를 본다. 白은 백지, 백두산, 백설공주 등에서 알 수 있듯 흰색/하얀색을 뜻한다. 이 한자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촛불의 모양을 그린 글자라는 설이 가장 유력한 것 같다. 그런데 왜 이 글자가 희다라는 뜻일까? 초가 흰색이어서? 나는 오히려 단순하게, 심플하게 생각해 봤다.
* 白(흰 백) ← 日(날 일) + 丿(삐침)
해(日) 위로 선(丿) 하나를 그어서 白이 된다. 日(일)은 잘 알다시피 해(태양)을 본딴 상형자다. 여기에는 어느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해 위에 있는 짧은 사선, 이것을 해에서 뻗어나가는 햇빛을 그린 것으로 생각해 보자. 이는 앞서 말한, 해를 똑바로 바라볼 때 우리 눈에 들어오는 아주 강한 빛이다. 그러면 왜 白이 희다라는 뜻을 갖는지 이 단순한 그림에서 바로 이해가 될 것이다.
정리하면, 희다와 검다는 가장 강하고 또 가장 약한 양극단의 빛의 양(量)을 가리킨다. 그런데 결국 빛을 눈이 감각한 색(色)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의 한계다. 그래서 희다는 하얗다와, 검다는 까맣다와 다를 게 없어지고 한국인은 이들을 마음대로 섞어서 쓰고 있다. 희다와 하얗다는 물리적인 숫자로서 컬러값은 같을지 몰라도, 그 출발이 빛과 색이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인도유럽어에서 텅 빔blank과 흰빛blanc, 검은black과 불꽃flame이 모두 같은 어원을 갖는다고
그녀는 읽었다.
-《흰》한강
나도 그녀가 읽은 문장에 동의한다. '텅 빔, 흰빛, 검은, 불꽃'은 나에게 각각 '하늘, 희다, 검다, 해'로 읽힌다. 이들은 우주의 근원이고, 이 세상의 시작이다. 이 중에서도 해의 빛은 인간의 생존과 모든 활동을 가능하게 했으니, 곧 인간의 언어는 빛이 만들었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 빛을 인간이 바라본 데서 나온 단어가 희다이다. 그러니 앞서 읽었듯이, 흰색은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색이고 다른 모든 색들을 가능하게 하는 바탕색'이 될 수 있다. 하얗다는 칠할 수 있지만, 희다는 절대로 그럴 수 없는 것이다.
** 참고 **
책. 한강 <흰>
책. 송근원 <우리 뿌리말 사전: 말과 뜻의 가지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