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국어생활 28
한국어에서 특정한 시간을 가리켜 서술하려면 시간관련 단어 뒤에 조사 '에'를 붙여야 한다. '2021년에, 11월에, 27일에, 토요일에'처럼 말이다. (사전의 풀이를 그대로 옮기면 '에'는 '앞말이 시간의 부사어임을 나타내는 격 조사'다.) 그러나 아래 단어들은 이 규칙을 적용받지 않는다.
* 그끄저께 - 그저께/그제 - 어제 - 오늘 - 내일 - 모레 - 글피
오늘의 옛말은 '오날(아래아)'이다. 위 단어들 중에서 유일하게 '날'이라는 글자가 쓰였다. 오늘은 한국인에게 가장 중요할 테니 (물론 모든 인간에게 그렇겠지만) 다른 단어들과는 다르게 특별대우를 받는 것 같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끄저께, 그저께, 어제, 내일, 모레'의 마지막 글자에 모두 ㅔ 모음(母音)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내일에 해당하는 순우리말이 '할재, 올제, 하제, 후제, 날새'였다고 했으니 생김새가 달라 보이더라도 이해해 줄 수 있다.) 단어의 끝소리가 이미 뒤에 붙는 조사를 품고 있으니 이 단어들에 '에'를 붙여 쓸 이유가 없을 것이다. 굳이 글자를 더하고 발음을 늘이는 것은 에너지 낭비이기 때문이다. (아껴야 잘 살죠!)
지금 지나고 있는 날인 오늘을 예외로 두면, 나머지 단어 중에서 글피만 성질이 다르다. 글피에는 반드시 조사 '에'가 필요하다. "내일/모레 만나."는 가능하지만 "글피 만나."는 안 된다. 왜 글피는 '글페'가 되지 못했을까? 내일의 순우리말은 없어도 모레와 글피가 있다고 외치고, 미래를 더 멀리 내다보는 한국어라며 스스로 위로하던 한국인이지만, 차마 사흘 뒤의 일에는 영 자신이 없었던 게 아닐까?
이처럼 한국인은 한 부류 안에서 대등한 관계를 이루고 있는 시간 관련 단어들조차 똑같은 방식으로 다루지 않는다. 시간에 대한 인식과 관점이 일관되지 않아서 단어를 다르게 쓰는 건지, 아니면 그 반대의 과정으로 정착된 건지 이유를 일일이 다 알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렇게 사용되는 현상과 용례를 알아보는 것뿐이다. 아래는 날짜를 가리키거나 기간을 셀 때 쓰는 단어들이다.
㉠ 날, 달, 해
㉡ 일, 월, 년(日, 月, 年) / ㉢ 주(週)
시간은 천문현상과 관련되어 있다. 인간의 눈을 중심으로 해, 달, 별의 움직임을 파악한 천동설의 관점에서는 해가 한 번 뜨고 져서 날(日/day)이 생긴다. 달(moon)이 차고 기우는 일정 주기가 달(月/month)이 되고, 계절을 바뀌어 별자리가 같은 위치로 돌아오면 한 해(年/year)가 지난 것이다. ㉠은 이를 가리키는 순우리말 단어이고, ㉡은 이에 대응하는 한자어다. ㉢의 주(週/week)는 양력에서 요일과 함께 사용되는 단위로 동양에서는 근대에 들어와서야 받아들인 개념이다. (우리나라는 1895년 갑오개혁으로 양력을 채택했다.)
날 + 날 + ... = 나날이
달 + 달 + ... = 다달이
해 + 해 + ... = 해해이
주 + 주 + ... = 주주이
날, 달은 글자를 더해갈 수 있지만 해와 주는 불가능하다. '해해이'와 '주주이'는 발음도 어렵다. (물론 [날나리]와 [달다리]도 더 나은 어감을 위해 ㄹ받침을 탈락시켰다.) 우선, 주는 순우리말도 아니고 한국인이 오래도록 사용해 온 단어도 아니다. 그래서인지 위와 같이 글자를 반복해 단어를 만드는 방식이 적용되지 않았다. 현대에 들어서 주중, 주말을 포함한 주의 개념은 일상 생활에서 중요해졌지만 한국인들은 '주주이'라는 단어의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의 개념에서 언제나 보다 앞서는 것은 요일일 것이다.
날과 달은 비교적 시간이 짧다. 그래서 '나날이'와 '다달이'라는 단어에는 한국인이 그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나 반복을 충분히 인지하고 감지할 수 있다는 능력이 드러난다. 그러나 해는 너무 길다. 비교해야 할 일들 사이의 시간 간격이 멀어지니, 행위를 자세히 또 오래 기억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한국인은 한 해를 기간으로 해서 달라지거나 돌아오는 일을 '해해이'로 이야기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아니면 주보다 요일이 중요하듯이, 이 또한 날과 달이 해보다 늘 앞섰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한국어에서 글자를 반복한 단어가 가능한지 여부로 한국인이 감각하는 시간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한국인이 어느 시간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번에는 한자어인 일, 월, 년, 주를 보자. 아래와 같이 각 단어 앞에 숫자를 붙여서 써 보겠다.
1일 : 날짜, 기간
1월 : 날짜, 기간
1년 : 날짜, 기간
1주 : 날짜, 기간
위에서 보듯 일, 년, 주는 날짜와 기간에 모두 쓰일 수 있다. 하지만 월은 날짜에만 가능하다. 월을 기간으로 말하려면 반드시 '개월(個月)'로 써야 한다. 한국인은 유독 월만 개수를 세는 것이다. (한국어뿐 아니라 중국어에서도 个月(=個月 개월)을 사용한다. 일본어도 비슷하게 ヶ을 써서 一ヶ月(1개월)로 쓴다. 한국어에 '개년(個年)'도 있긴 하지만 이것은 주로 어떤 계획이나 프로젝트 등의 한정된 기간을 말할 때 용어로 사용되고, 일상 대화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다.) 이 단어를 만들었던 옛사람들은 확실히 매일 비슷하게 뜨고 지는 해(sun)보다 모양이 달라지는 달(moon)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보름에서 그믐으로, 다시 보름으로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보면서 시각적으로 시간을 감각하고 수를 셌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날을 세는 순우리말인 '하루, 이틀, ... , 열흘, ...'에도 달의 이름인 '보름, 그믐'도 있다. 세월(歲月)이라는 단어에서도 이 관습이 확인된다. 歲는 사람의 나이를 셀 때 쓰는 글자이니, 세월이라는 단어에는 나이와 달이 들어있다. 한국인은 나이를 먹고, 달을 세면서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것이다.
해(sun)가 만들어내는 낮밤과, 달라지는 달의 모양에서 느껴지는 시간은 감각의 차원에서 완전히 다르다. 그러니 당연히, 계절이 바뀌는 것도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일 것이다. 아래 네 개의 단어에서도 계절을 다르게 바라보는 한국인의 관점을 볼 수 있다.
㉣ 봄, 여름 / ㉤ 가을, 겨울
위 단어들의 어원은 다양하다. 오래도록 농사를 짓고 살았던 민족이었으니 계절을 근거로 하는 의견들이 많다. 하지만 어느 기자의 글처럼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맛에 있다. ㉣은 '-으(ㅁ)'을 쓴 명사형으로, ㉤은 '-(으)ㄹ'이 붙은 관형사형이다. 봄, 여름은 닫혀 있고 가을, 겨울은 열려 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하면 성장(봄, 여름)과 쇠락(가을, 겨울)의 기운을 따라서 '볼, 여를, 가음, 겨움'으로 하는 게 맞지 않았을까? 아니면 음양의 조화와 균형을 위해 일부러 반대로 이름을 붙인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형태에 별다른 의미를 담으려는 의도가 없었던, 그저 우연일 뿐일까? 어느 누구도 단어의 어원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번 주제에서 한국어의 시간 관련 단어에 대해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한국어의 시간이 제멋대로 가는 건 한국인이 시간을 마음대로 다루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왜 이러는지 나름 이렇게 저렇게 추측해 보고 설명하려 했지만, 사실 그저 그럴 듯해 보이게 갖다 붙인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이런 한국인의 변덕을 변호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냥 "한국어는 원래 그래"라고 하는 게 훨씬 편하다.
** 참고 **
<아시아경제> [낱말의습격]봄여름가을겨울은 무슨 뜻일까
https://www.asiae.co.kr/article/2017042510030097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