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국어생활 35
언론 기사나 온라인에서 한국어의 외래어 표기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거나 아쉬움을 표현하는 글을 쉽게 볼 수 있다. 저마다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표기법이 원어의 발음과 소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국립국어원의 입장은 명확하다. 외래어 표기법은 한국어에서 사용되고 있는 외국어 단어를 통일된 방식으로 적기 위한 것이지, 외국어 발음을 정확하게 표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외래어 표기법 중에서 이번 주제인 된소리에 관한 것만 살펴보자. 한국어는 '예사소리-거센소리-된소리(평음-격음-경음)' 3단으로 구분되는데 이것이 다른 외국어의 문자, 발음과 일대일로 대응되지 않는다. 파열음을 예로 들면, 영어는 한국어의 거센소리에 가깝고 스페인어는 된소리에 가깝다. (코리아와 꼬레아가 좋은 예다.) 그런데 이들을 언어마다 따로 적어야 한다면 표기가 너무 많아지고 규정이 복잡해질 것이다. 그래서 극히 예외적인 일부의 경우가 아니면 외래어를 표기할 때 된소리를 쓰지 않는 쪽으로 정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영어의 영향력과 된소리를 속된 말로 낮잡아보던 이유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1986년 외래어 표기법이 제정된 후에 전국의 수많은 '쎈타(center)'가 '센터'로 바뀌어갔다. (물론 읽을 때는 여전히 [쎈]터이긴 하다.) 전쟁과 후유증으로 나라가 가난했던 시절, 미군 병사를 쫓아다니던 아이들이 외치던 "쪼꼬레또(chocolate)"를 이제는 '초콜릿', 또 '쇼콜라'로 부른다. 이렇게 정리가 되어 사람들이 잘 사용하게 된 사례도 있지만 반대로 영 언중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도 많다. thank you를 '생큐'로 sorry를 '소리'로 쓰는 게 최선인 걸까?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국립국어원에서 정하는 것과 별개로, 사람들이 단어를 실제로 쓰고 읽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외래어 표기법을 따른 단어들은 된소리 표기를 피하고 있지만, 영어 이외의 언어를 말할 때 언중의 입에서는 된소리가 많이 쓰인다. 잠시 옛날 TV, <개그콘서트>의 봉숭아학당 코너를 틀어보자.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라따~ 라따~ 아라따~"라는 유행어로 인기를 끌었던 곤잘레스(송준근 분)는 자기소개에서 "나는 멕[끼꼬]에서 온 곤잘레즈~"라고 소개한다. 멕시코(Mexico)를 영어가 아닌 스페인어로 발음한 것이다.
㉠ 칸-깐느, 푸켓-뿌껫, 에스파냐-에스빠냐, 사천-쓰촨 / 틴틴-땡땡, 파파이스-뽀빠이
㉡ 세인트폴-쌘뽈, 도미니카-도미니까
위 단어들에서 이런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 중 지명은 표기법을 따르면 된소리가 없는 것을 써야 한다. 하지만 원어에 가깝게 들리는 대로 말하고 쓰면 된소리가 들어가고, 그렇게 사용하는 한국인도 많다. (재미있게도 시금치로 대표되는 뽀빠이는 패스트푸드인 파파이스가 되어 한국으로 왔다. 또, 벨기에 작품인 tintin은 출판 쪽에서는 땡땡, 영화 쪽에서는 틴틴으로 정리된 것 같다.) 이들은 된소리로 바꾸더라도 가리키는 대상이 달라지지는 않는데 ㉡은 주의가 필요하다. 세인트폴과 쌘뽈은 사도 바오로(Saint Paul)다. 각각 영어와 프랑스 발음을 원어에 가깝게 적은 것이다. 그런데 지도에서 찾으면 세인트폴은 수도권에, 쌘뽈은 충남 논산에 있다. (둘 다 학교 이름이다.) 한 사람의 이름이 다른 모양으로 학교 앞에 놓이면 전혀 다른 장소에 위치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달리, 북한은 외래어 표기에 된소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 영어권인 도미니카연합을 '도미니카'로, 스페인어권인 도미니카공화국을 '도미니까'로 쓴다. 그러니 외래어를 표기할 때 된소리의 사용여부가 단순히 표기가 다르다는 언어 차원의 문제에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된소리 표기 자체가 많이 사라졌지만 꿋꿋이 살아남은 것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 음식 중에서는 앞서 다룬 빵, 짬뽕 이외에 껌이 있다. 껌(gum)은 표기법이 제정된 후에도 검으로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gum은 절대로 검으로 쓸 수 없다. "검을 삼키다"라고 말하는 것을 검(劍)을 삼킨 것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니다. 근래 들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것 중에 하나가 서커스, 차력쇼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녔던 유랑단의 대표 프로그램 중 하나가 검(劍) 삼키기였다. 딱 아이들이 따라해 보고 싶게 만드는 묘기 아닌가? 검 삼키기 분야에서 저명한 인사로는 스웨덴 의사이자 통계학자인 故 한스 로슬링(Hans Rosling)이 있다. 그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잘못된 관념을 바로잡는 물방울 그래프만이 아니었다. 그는 무대 위에서 검을 삼켰고, 청중은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1948년생인 그는 어릴 때 검 삼키기를 보고 서커스 단원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부모나 의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만약 아이가 실수로 삼킨 것이 gum인지 劍인지 확인을 해야 그에 맞는 처치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한국인은 검과 껌으로, 둘을 확실히 구분해야 했을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이 이야기는 진실 혹은 거짓 중 하나다. 물론 된소리가 들어가야 gum이 더 맛있어지는 이유도 있다.)
한국인에게 된소리로 채택되어 확실히 자리잡은 단어들은 생각보다 많다.
㉢ 몸뻬(もんぺ), 삐라(ビラ/bill), 삐삐(beeper), 땜빵(temping)
㉣ 쓰레빠(slipper), 따블/떠블(double), 빤스(panties), 뽐뿌(pump), 빵꾸(puncture)
㉤ 찌라시(散らし), 쌤쌤(same same), 빠떼루(par terre), 쁘락치(фракция)
㉢은 한국에 들어올 때 된소리가 쓰여서 된소리를 덜어낼 수 없는 단어들이다. パン[팡]이 '빵'이 되었듯이 한국인은 もんぺ[몸페]를 몸뻬로 바꾸면서 ㅃ을 사용했다. ('일바지'로 바꿔서 사용할 것을 권장하지만 잘 안 되고 있다. 된소리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 영어의 bill[빌]은 일본에서 ビラ[비라], 한국에서는 '삐라'가 되었다. 영어와 일본어에서는 전단지, 광고지라는 뜻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삐삐는 말맛을 기막히게 잘 살린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영어 발음 [비퍼]와 비슷하면서도 전자음 소리 "삐-"가 반복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니 아무리 법을 들이밀어도 이제와서 비퍼로 쓸 수는 없다. (물론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미 사라진 문물이 되었지만.) 땜빵의 어원은 불명확하다. 예전에는 '땜+빵'으로 '빵꾸를 때우다'가 아닐까 했는데 최근에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우연히 영화 <스쿨 오브 락(School of Rock)>을 보다가 "I'm not a temp. I'm a sub.(땜빵이 아니라 대리교사라니까.)"라는 대사를 들었기 때문이다. (temping은 임시직이라는 뜻이다.) 중요한 건 어원이 맞다고 하더라도 이제 와서 어느 한국인도 '템핑'으로 바꿔서 말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은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표준어와 된소리가 모두 쓰이는 단어들인데 이때 둘은 쓰임이 달라진다. 슬리퍼(slipper)는 실내에서 신는 신발이다. '쓰레빠'는 슬리퍼의 속된 말이지만, 집안에서 쓰레빠를 신는 사람은 없다. 한국에서 슬리퍼와 쓰레빠는 안과 밖으로 사용처가 나뉜다. double은 보통 더블유(W), 더블 침대, 더블헤더처럼 '더블'이지만 돈에 쓰이면 '따블(떠블)'이 된다. 예전에 한국인들은 남보다 먼저 택시를 잡기 위해 돈을 더 내겠다며 '따블, 따따블'을 외쳤고, 곽철용은 잃은 돈을 찾으려고 묻고 '떠블'로 간다. 요즘도 '따상'같은 단어에 쓰이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촌스러운 단어는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었어도 여전히 매력적이다. panties는 한국어에서 '팬티'로 쓰지만, 어찌어찌 '빤스(또는 빤쭈)'가 되었다. 만약 한국인의 입에서 빤스가 살아남지 못했다면 '치사빤스, 빤스런'은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과연 ‘치사팬티’라는 단어를 생각이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pump는 물 근처에서는 '펌프'로, 지름신이 가까이 올 때는 '뽐뿌'로 읽는다. (다만, 일부 지방에서 사투리로 물펌프를 뽐뿌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타이어에 바람이 빠졌을 때, 약속이나 일정을 갑자기 취소했을 때 '펑크' 또는 '빵꾸'가 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양말(또는 옷)에서는 빵꾸만 된다. 사전을 찾아보면 양말에 펑크가 가능하다고 예시가 나오는데 개인적으로는 영 마뜩잖다. 양말에 펑크라고 할 바에야 구멍이 났다고 하는 게 훨씬 낫다.
㉤은 제발 된소리로 쓰지 말라는데도 입말에서 도저히 안 되는 것들이다. 찌라시의 표준어는 '지라시'다. 보통 언론에서는 항상 따옴표가 앞뒤로 붙는데 보고 들을 때마다 어색하다. '똑같다'는 뜻으로 쓰이는 same same은 사전에 '샘샘'으로 올라있다. 입말인 '쌤쌤'을 검색하면 친절하게 샘샘의 비표준어라고 나온다. ('샘샘'은 멋진 꼬마 슈퍼맨이라고!) 1996 미국 애틀란타 올림픽 레슬링 중계에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던 빠떼루 아저씨(김영준 교수)는 표준어인 '파테르'를 사용하지 않아서 방송국의 징계를 받을 뻔했다. 훗날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은 프랑스식 심판교육을 받았고 ‘빠떼루(par terre)’라고 배웠다고 해명했다. 내 생각에는 당시에 표준어를 사용하셨다면 ‘파테르 아저씨’가 되지는 못하셨을 것이다. (이름이 확 와닿지 않고, 왠지 파스퇴르와 비슷하기도 하다.) фракция를 프락치로 써야 하지만 많이들 쁘락치로 썼다. 러시아어의 ф[에프]는 영어의 F 발음과 같다. 앞서 F를 ㅃ으로 바꾼 경우로 뻑큐(Fuck You)밖에 찾지 못했다고 했는데 쁘락치를 만나서 반가웠다. 프락치는 러시아어에서 '당(黨), 파(派)'를 뜻하는데 한국어에서는 완전히 다르게 '간첩, 배신자'의 의미로 쓰인다. 에프(F, ф) 발음을 한국어로 옮길 때 ㅃ으로도 쓸 수 있다면, 그건 틀림없이 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