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된소리가 된다 (4)

한국인의 국어생활 36

by 집우주

故 최명희 작가의 대하소설 제목인 <혼불>을 처음 봤을 때,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헷갈렸던 기억이 있다. 혼[불]과 혼[뿔] 중에 어느 쪽이 맞는 걸까? 혼불(魂불)은 작가의 고향인 전라도 방언이어서 사전에서 찾을 수 없었고, 당연히 발음 정보도 나와 있지 않았다. 문득 그때가 생각나 검색해 보니 나 같이 궁금했던 사람들이 온라인가나다에 문의한 글을 찾을 수 있었다. 국립국어원은 처음에 '된소리로 발음될 환경이 아니므로 [혼불]로 발음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했다가 이후 답변을 추가하여 '사잇소리 현상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혼뿔]로 발음할 수 있다'고 내용을 수정했다. 정답은 [혼뿔]이다. (작가는 물론 모든 출연자들이 그렇게 말한 영상을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에 나는 맞는 발음을 알고 '뿔'을 냈지만, 설령 내 입에서 '불'이 났더라도 화를 당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저 잘못 알고 있었던 발음을 고치면 그만인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어에는 된소리로 발음 여부로 뜻이 달라지는 단어들도 있기에 주의해야 한다.


* 잠자리, 고가, 신기, 불법, ...


번역 사이트에 들어가 왼쪽 창에 '잠자리'를 쳐 보자. (나는 구글과 파파고를 이용했다.) 번역할 언어를 영어로 설정해 놓았다면 오른쪽 창에 dragonfly가 나올 것이다. 아주 훌륭한 번역이다. 하지만 문제는 문자가 아닌 소리에 있다. '잠자리'를 입력한 왼쪽 창에서 듣기 버튼을 눌러보자. 어떤 여자가 단어를 읽어줄 것이다. (아직 사만다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잠짜리". 응? 뭐라고? 잘못 들었겠지. 다시 눌러보자. "잠~짜~리~". 천천히 한 글자씩 들려오는 소리가 선명하다. 흠흠... 엣헴... 이건 곤충채집으로는 못 갖는 거잖아. (feat.ZICO)


dragonfly는 잠[짜]리가 아니다. 이건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얘가 잘못된 거다. 한국어에서 잠자리는 두 가지 소리로 읽을 수 있고, 그 뜻은 완전히 다르다. 한국인인 나도 이런 일을 겪었는데 만약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이 dragonfly를 [잠짜리]라는 발음으로 익힌다면 실제 언어생활에서 나같이 당황스러운 상황에 놓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한국어 실력이 된다면 조크, 농담 등으로 잘 써먹을 수도 있다.) 그러니 이런 단어를 읽을 때는 문장과 맥락을 따진 후에 된소리를 넣을지 말지 결정해야 한다. 한국인은 '고가' 앞뒤에 놓이는 단어에 따라서 高架[고가] 또는 高價[고까]로 읽는다. 神奇[신기]는 하다와 붙여 쓰고, 神氣[신끼]는 있다의 주어라는 것을 안다. 不法과 佛法의 표준발음은 모두 [불법]이었지만 오래도록 한국인의 입에서 不法만은 [불뻡]이었다. 결국 2017년에 不法[불뻡]으로도 인정되면서 여전히 [불법]만 가능한 佛法과 소리로서 구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국인은 된소리에 대한 감각이 있어서 이들을 순간순간 잘 구분하지만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공부다. (번역기의 인공지능도 한국 사람이 아니니까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이번에는 상황에 따라서, 또는 한국인의 마음 대로 된소리가 더해지는 단어들을 살펴보자.


㉠ 속, 점, 볼(ball)

㉡ 생(生), 다운(down)

㉢ 백(back, bag)


㉠은 글자가 놓인 위치를 봐야 한다. '속'은 단독으로 읽거나 어절의 첫 글자로 쓰이면 [속]으로 읽힌다. 그런데 몸, 이불, 사진, 영화, 날씨, 기억, 무관심 등등 단어가 속 앞에 놓이면 [쏙]으로 소리가 바뀐다. '점'도 비슷하다. '0.1'을 '영[점]일'로, '100점 만점'을 '백[점]만[점]'으로 읽는 한국인은 없다. ('천점 만점'일 경우, 앞은 [점]으로 뒤는 [쩜]으로 구별한다.) 비슷하다고 한 건, 점은 종종 "눈밑에 [쩜]이 있네."처럼 일부 한국인에 의해 단독으로 쓰일 때 된소리가 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시즌은 아니지만 야구 중계를 들어보자. 포볼, 파울볼, 플라이볼, 그라운드볼에서 '볼'은 모두 [볼]이다. 그런데 땅볼, 아리랑볼은 [뽈]로 발음한다. 나름 머리를 굴려 찾아낸 규칙은 볼 앞의 단어가 영어면 [볼], 한국어면 [뽈]이라는 것이다. 볼이 한국화가 되면 뽈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볼'이 단어의 첫 글자이면 [볼]넷, [볼]카운트에서 들리듯 언어에 상관없이 '볼'로 읽는다. (다만, 볼 보이(ball boy)는 [뽈]보이로도 읽는데, 볼 걸(ball girl)은 확실히 [뽈 걸]로는 읽지 않는 것 같다.)


㉡처럼 어울리는 짝이나 역할에 따라 된소리가 더해지기도 한다. 생(生)은 접두사이니 늘 단어의 첫 글자로 쓰인다. 생화, 생고기, 생맥주 등에서 '살아있는, 가공하지 않은, 신선한' 등의 의미다. 그런데 생쇼(生show)만 [쌩쑈]다. (한국에서 쇼(show)는 언제나 [쑈]다.) 꽃, 고기, 맥주 같은 고정된 사물이 아닌 [쑈]의 활동성을 표현하고 강조하기 위해 한국인이 된소리를 넣은 게 아닌가 한다. 그리고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생쇼]라고 하면 개인적으로는 '생+맥주'의 형태와 같이 '생+뱅쇼(vin chaud)'의 준말로 생각된다. (생맥주를 '[쌩]맥'으로 줄이기도 하는데 이때 된소리를 넣는 이유는 결국 시원하게 톡 쏘는 '맛'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쇼(生chaud)가 가능하다고 해도 '[쌩]쇼'로 발음하지는 않을 것이다. 와인이 주는 맛과 향과 분위기는 맥주와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다운패딩, 다운타운, 다운증후군'의 down을 [다]운으로 읽는다. 여기에서 down은 명사로 새의 솜털, 시내, 사람을 가리킨다. (다운증후군은 영국 의사 John Langdon Down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하지만 '다운계약서, 다운로드, 다운받다, 분위기가 다운되다, K.O. 다운시키다'는 보통 [따]운이다. down이 '아래로'의 뜻이나 동사로 쓰일 때는 주로 [따]로 발음하는 것이다. ([다]운펌은 예외인 것 같다.)


㉢은 명확한 기준을 모르겠다. 백(back)은 첫 글자에서는 백업, 백넘버, 백댄서, 백미러, 백어택, 백엔드, 백립에서 들리듯 모두 [빽]이다. 주먹이든 돈이든 권력이든 뒤에서 받쳐 주는 사람이나 세력을 뜻하는 단어도 '빽(background)'이라고 한다. 그런데 back은 같은 축구 용어이지만 유럽에서 오면 [빽], 미국에서 온 건 [백]이다. 한국어 중계를 들어보면 축구(Soccer)에서는 보통 센터[빽], 쓰리[빽](centerback, three back)이라고 하는데 미식 축구(American Football)의 포지션은 쿼터[백], 런닝[백] (quaterback, runningback)으로 읽이다. 어떤 약속이 있었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백(bag)도 이랬다가 저랬다가 한다. 샤넬백, 구찌백, 명품백, 골프백, 쇼핑백, 종이백, 에코백, 지퍼백, ... [빽]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한국인들은 핸드백, 티백, 샌드백에서는 [백]이다. 로진백은 말하는 사람 마음이다. 여기에서 백과 빽을 결정하는 기준을 찾는 게 의미가 있는 일일까? 그냥 한국인의 된소리 입맛이 변덕스럽다고 하는 게 속이 편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내가 볼 때 된소리는 문법이나 규정을 따라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입에 짝짝 달라붙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더 중요해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늘 마음대로 이랬다 저랬다 할 수는 없다. 상황에 따라서 반드시 된소리가 필요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김두한 : 사 딸라.

미군 : (한글 자막) 2달러! 두 배요, 두 배!

김두한 : 사 딸라.

미군 : (한글 자막) 2.5 달러!

김두한 : 사 딸라.

미군 : (한글 자막) 말도 안 돼! 3 달러!

김두한 : 사 딸라.

미군 : (한글 자막) 미치겠구만 좋다. 4 달러!

김두한 : 오케이. 땡큐. 오케이, 사 딸라!


드라마 <야인시대>의 한 장면이다. 한국 역사에서 외교 담판으로 강동 6주를 얻어낸 서희(徐熙)를 최고의 협상가로 꼽는다면, 한국 드라마 역사에서는 '포 달러(four dollars)'도 아닌 "사 딸라."로 노동자의 임금을 네 배나 올린 김두한이 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 성공적인 협상은 한국어에 된소리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김두한 역을 맡았던 김영철 배우가 외래어의 표준 발음을 지켜야 한다며 "사 달라."라고 했다면 협상 테이블은 정반대로 기울어졌을 것이다. (표기법에 따르면 dollar는 '달러'이지만 한국인은 '달라'로 읽기도 한다.) 그랬다면 대한민국의 근현대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적어도 버거킹의 올데이킹 메뉴를 4900원에 먹을 기회가 없었다는 한 가지는 확실하다.)


지금까지 표기에 없지만 된소리가 나는 단어들을 찾아봤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쌍자음이 써 있지만 된소리로 읽으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아래는 이른 바 '에어비앤비체'에서 된소리가 나는 쌍자음을 활용한 사례다.


한꾹인뜰만알아뽈쑤있께짝썽하껬씁니따.

쩔때여끼로오찌마쎄요.

쪠뽤 가쮜뫄쉐요.


숙박 공유 서비스인 에어비앤비(Airbnb) 사이트에는 이용자들이 후기를 남긴다. 이때, 숙소 이용에 불만을 겪은 한국인은 호스트(집주인)나 외국인 이용자는 알아볼 수 없게 한글을 난독화한다. (쌍자음을 활용하는 것뿐 아니라 연음, 자음 중복, 의미 없는 받침 추가 등의 방법이 있다.) 내가 호스트라면 당연히 외국인이 쓴 내용을 번역기로 돌려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위 글을 아무리 번역기로 돌려도 도저히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앞뒤로 한두 문장만 괜찮은 내용을 써 놓으면 위 글은 좋은 평가가 된다.) 하지만 쌍자음을 덜어내는 방법을 아는 한국인끼리는 이 내용을 공유할 수 있다. 심지어 소리를 내어 읽어주어도 바로바로 알아듣는 게 가능하다. 이쯤되면 참 놀라운 된소리, 대단한 한국인이 아닌가?



** 참고 **

오마이뉴스. <한글의 '응용력' 보여주는 에어비앤비체>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78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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